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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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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    SNS의 “꽃”, 디카시 댓글:  조회:743  추천:2  2020-09-21
칼럼   SNS의 “꽃”, 디카시   김혁   요즘 인터넷이나 위챗을 통해SNS(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에 떠오르는 글들을 들여다 보면 은연중 디카시가 붐이요, 압권이다. 이른바 “디카시”란 디지털 카메라와 시가의 합성어이다. 작자 자신이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로 시적 감흥을 일으키는 형상을 포착해 촬영하고 그 시적대상에서 어떠한 정서적 령감을 떠올려 5행 이내 짧은 시적언술을 결합하여 만든 뒤 SNS등으로 실시간 소통하는 창작방식을 가리켜 말한다.    디카시는 불과 십여년 전 중국 정주경공업대학 한국어과 교수로 있는 리상옥 시인이 인터넷 한국문학도서관 코너에서 처음 “디카시”라는 용어를 사용한 뒤 최초의 디카시집을 출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천고의 시간동안 탁마해 온 시조 등 쟝르에 비하면 다밭은 시간이지만 디카시는 이미 기존 시의 카테고리를 넘어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하는 다매체 시대의 새로운 쟝르로 무섭게 떠오르고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일상의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여가고 있는 시대다. 멋진 풍경이나, 예쁜 정물, 잊지 못할 장소 등 기억해 둘 장면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그를 향해 앵글을 맞춘다. 모두들 종류별별의 핸드폰으로 마음에 드는 풍경과 사물을 폰에 속속 담는다. 그리고 시를 입힌다. 혹자는 이미 쓴 시에 풍경을 입힌다. 습작기에 배운 은유, 직유를 마음의 눈으로 장착하고 시와 풍경 속에 담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비범한 예술작품으로 승격하는 순간이다.    “인류 력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중 하나로 꼽히는 카메라”가 세상에 나온 지도 200년, 스마트폰의 성능은 전통의 카메라를 뛰여넘을 만큼 발전했다. 그 눈부신 혜택을 입어 모두들 담아낸 영상들이 웬만한 전문가의 작품 못지 않다. 그렇게 촬영가로 “둔갑”한 시인들이 시작품과 그럴듯한 촬영작품을 동시에 뽑아 내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체와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진 디카시 작품들을 감상하노라면 시를 읽는 기쁨도 두, 세배로 가배되는 상 싶다. 읽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 생각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준다. 전문 사진가들을 뺨치는 영상과 시편에서 번뜩이는 직관의 서정은 SNS에 매여 사는 요즘의 새로운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족하다. 게다가 명곡이나 최신 류행음악까지 곁들기도 해 그야말로 오감만족의 흥그러운 향연이다.    디카시는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재빨리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누구나 손 쉽게 감상할수 있고 쓸 수도 있다. 현학적이고 요설적인 말장난으로 독자들로부터 멀어진 요즘의 시와는 다르게 선명한 대중성을 띄고 있다. 또 길지 않고 매력있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고 각광받는 시대 짧은 글과 즉석사진이 전하는 울림이 제법 크고 깊다.  때문에 디카시가 이러한 대중의 문화 향유의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는 신종의 쟝르로 락점, “간택”된 것이다. 어느 비평가가 정평했 듯이 디카시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일상성'을 가졌고, 복잡다단한 세상을 상징적으로 요약하는 '압축성'과 전자매체 영상문화의 시대를 반영하는 '영상성'을 가졌으며, '쌍방향 소통성'”까지 가진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최적화 된 대중적 쟝르로서의 디카시의 보급은 가히 폭발적이여서 해외에서는 교과서와 사전에 디카시의 정의가 실리기도 하고. 작품공모전, 전문지 발표, 시집출간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문단에서도 많은 이들이 뒤미처 이 쟝르의 매력에 일견경심(一见倾心) 빠져든 듯 하다. 작가적 상상력과 톡톡 튀는 개성이 십분 드러나는 작품들로 하루에 쏟아지는 디카시의 량이 적지 않다. 북경, 상해  등 여러 지역에서는 이미 디카시 동아리들이 무어져SNS에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촬영수준의 미달과 짧은 글줄에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로정(露呈)하는 작품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 창작인구가 재빠르게 늘어나고, 게다가 기성작가들도 기꺼이 동참하여 작품의 수준들이 고르게 편재되고 있다.   그럼에도SNS의 불붙는 열조에 반해 우리의 문단은 아직 디카시를 마중 할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여태 디카시를 게재한 잡지도 없고 이 새로운 쟝르에 대해 진맥한 비평가들도 보이지 않는다. 문학열성자들이 스스로 창작하고 동아리를 뭇고, 향유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은 문단과 독자들이 오로지 잉크 냄새 나는 툽상스러운 잡지 한 두권에 붙매였던 옛날과는 다르다. 독자들의 심미수준은 다원화되여가고 참조계 또한 다양하다. 문화와 예술의 패러다임은 재빠르게 바뀌고 있고 이는 더 많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 어쩔 수 없는 문학의 위기에 넋두리를 늘여 놓는 대신, 바뀌여진 창작방식과 새로운 쟝르에 적극 부응할 때 그 것은 침체되여 있는 우리의 문학을 새롭게 촉발시키는 기꺼운 현상으로 고착될 수 있을 것이다.    형식미의 최고를 자랑하는 중국의 고시나 간결함과 명징함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의 하이쿠(癸句, 3행17음절 5•7•5조의 률격을 엄격히 고수하는 일본의 전통시)는 인류문학의 보고(宝库)로 남았다. 쟝르의 경계를 뛰여넘는 디카시 등이 그 계보를 이어나갈지 주목된다.    “기화요초”가 어우러진 SNS에서 신선한 쟝르의 “꽃”들이 더욱 흐드러지게 만개하기를, 그리고 SNS작가들, 디카시 동인들의 순발력 있는 약진을 바란다.  ‘ “연변일보” 2020년 9월 17일  
441    3D마스크 댓글:  조회:715  추천:9  2020-09-21
단편소설   3D마스크   김혁   ​   거울 앞에 마주서서 마스크를 착용했다. 방송 전문프로에서 알려준대로 하얀 색의 무직포(无纺布)면을 안으로 하고 남색 방수층을 바깥으로 하고 금속 띄가 있는 부분을 우로 향하게 착용했다. 혹여 거꾸로 끼지 않았나 다시 살펴 보았다. 손바닥으로 량볼쪽을 잘 펴주어 마스크와 안면 사이에 틈이 없도록 했다. 추위를 막고자 방한복을 입고 옷에 달린 후드를 눌러쓰고 립체형 마스크를 착용하니 삼엄하게 꾸민 품이 마치 공상영화에 나오는 등등한 로보트처럼 보였다.   3중 구조의 필터를 적용해 감염원으로부터 호흡기 보호가 가능한 방역용에 적용되는 마스크였다. 안감은 피부자극 테스트를 완료한 원단이며, 사용자가 착용후 답답하지 않도록 3D 방식의 구조 설계로 면적을 넓혔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예방을 위해선 이러한 등급의 3D마스크가 요즘들어 너나가 다투어 사들이는 필수품이다. 이전에는 딸애 또래들이 멋을 부리고 개성을 살리기 위해 마스크를 짐짓 착용했지만 요즘들어 마스크는 그무슨 기호와 멋의 선택이 아닌 제1 필수품으로 자리매김되여 있었다. 사재를 털어 마스크를 기부하는 기업인들도 있는가 하면 그 와중에 마스크를 사재기 하여 한 몫 챙기는 야말스러운 인간들도 있어, 요즘 마스크는 부쩍 많이 떠오르는 화두였다.     이 마스크를 사고저 시가지 곳곳의 약방들을 참빗질 했다. 두, 세시간 씩 줄을 서기도 했다. 목타는 기다림 속에 규정대로 한정량이나마 다섯 장의 마스크를 사들고는 또 다른 약방으로 달려 갔다. 그렇게 련 며칠간 진동한동 뛰여다니며 온 가족이 한동안 착용할 수십장의 마스크를 구해들였을때 그 성취감은 그야말로 무인도 기암 틈새에 감추어진 보물함이라도 찾아든 심경이였다. 개선장군의 심정으로 집에 돌아와 안해와 딸애에게 마스크를 보란듯이 내놓았다.   - 수고했어요. 여보   - 아빠 최고!   금붙이를 생일선물로 받기라도 한듯, 마스크를 착용해 보며 딸애와 안해는 그렇듯 기뻐했다. 출근도 못하고, 학교에도 가지 못한채 집에 붙박혀 무형의 초조감에 꺼둘려 있던 그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화사한 미소가 피여 올랐다. 그 무슨 신화 속 신농씨(神农氏)처럼 신산유곡을 헤매며 약초를 구하듯 애면글면 약방들을 누비다 돌아온, 목이 타하는 나에게 안해가 랭장고에서 시원한 과일시럽을 꺼내 컵에 그득 따라주었다. 가슴 한자락 습윤하게 적셔주는 시럽의 청량함을 느끼던 나는 은연중 사과배 꽃이 백사지(白沙地) 같이 피여 있는 과수원을 떠올렸다. 그리고 과수원 사과배 나무 아래 서있는 쪼글어 든 사과배 같은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 어머니에게도 마스크 몇장 가져다 드려야겠소   나는 그 어떤 계시의 부름을 받은 신자처럼 급기야 소리를 높여 말했다.   - 아무렴요, 그런데 여보…   안해가 미간을 찌프렸다.   - 어찌 다녀 오겠어요, 구역통제기간이라, 차도 못 뛸턴데     안해가 마치 현애탄을 건너는 사람을 걱정하는 듯 한 어조로 말했다. 하긴 안해의 말이 맞았다. 혹한과 함께 덮쳐든 귀축 같은 바이러스때문에 세상은 질겁해 저마다 문을 꽁꽁 닫았고 빈지를 한겹 한겹 걸었다. 초유의 사태에 아파트 단지마다 봉쇄관리에 들어갔고, 현성과 시가지 사이의 뻐스며, 일체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였다. 어머니가 계시는 향촌마을도 언녕 여느 마을처럼 봉쇄되여 외부인원들의 출입이 금지되여 있을터다.   - 그래도 한번 가봐야겠소, 이 사태에 로인네가 홀로 어떻게 지내는지, 설 문안조차도 못갔는데...   무던한 며느리였던 안해는 아무 말없이 내가 사온 마스크 중에서 한세트를 덜어내여 내주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립춘에 내린 눈은 아직도 녹지않고 있었다. 꽁꽁 봉한 모자와 마스크 틈새로 서려드는 랭기가 선뜻 차가웠다.   아파트 단지를 출입하려면 “통행증”을 내고 자신의 동선을 일일이 체크해야 했다. 한 가족 중에 하루에 한사람 밖에 바깥 출입을 못하게 되여 있다. 아파트 관리원 몇몇이 특별히 붉은 조끼를 차려 입고 아파트 단지의 대문가에서 지키고 있었다. 통행증을 내보이고 아파트 동 번호와 층수를 말하고 출입등록부에 신분증 번호와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었다. 지키는 사람도, 드나드는 사람도 모두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마스크 우로 드러난 미간에는 단단한 긴장이 서려있었다.   대문가에 커다란 방역 포스터가 몇장 붙어 있었다. 진지한 표정의 만화 캐릭터에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손을 자주 씻읍시다”라는 예방수칙이 적혀 있었고, 또 한 포스터에는 무한의 절경 황학루 앞에 피여난 화사한 벚꽃과 이 곳의 명물인 사과배꽃이 어우러져 핀 중에 “힘내세요 무한!”이라는 비원과 응원의 문구가 커다랗게 씌여져 있었다. 다른 포스터에는 “겨울이 왔으니 봄은 멀지 않으리”라는 영국시인 쉴레의 명시의 한 구절도 패러디 해 씌여 있었다.   거리는 텅 비여 있었다. 실북 나들듯 하던 차량도, 희희락락 오가던 사람도, 온 거리를 왁자하게 메우던 소음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우뚝우뚝 솟은 건물들은 마치 빙동되여 방치된 어물을 방불케 했고, 그 사이를 걷노라니 마치 한부의 블록버스트급 영화제작을 마치고 비여진 세트장이라도 걷는 양 싶었다. 시가지를 꿰질러 홀로 걷노라니 몽매(梦寐)에라도 들린 듯 싶었고 쓸쓸한 감 까지 들었다.   (우리가 왜 이지경에까지 이르렀을가?)   나는 아침나절에 누군가 위챗 모멘트에 올린 한구절을 떠올렸다. “자연의 역습”의 저자 월터스가 갈파한 경구였다.   “현대사회는 ‘환경전염병’이라는 자연의 역습에 직면해 있다. 광우병, 에이즈, 사스와 같은 환경전염병은 동물을 매개로 감염되지만, 실제 이를 불러들인 주범은 욕망의 충족을 위해 자연에 개입해 온 인간들이다.”   엄슬(严瑟)한 바이러스에 맞닥뜨려 집에서 연금아닌 연금생활을 하면서 은연중 사색하는 버릇을 키우게 되였다.     시가지를 벗어나는 경계에서 또 한번의 검역이 있었다. 신분증 번호를 대였고 겸역원이 들이미는 전동 면도기를 방불케 하는 체열검사기 앞에 고스란히 이마를 들이 대였다.   - 36도 5! 정상입니다.   제복차림에 마스크를 꼭 낀 녀자 검역원의 눈섭은 김에 불려 하얀 서리가 앉아 있었다.   - 어데를 멀리 가세요? 이 사태에   검역원이 텅 비다 못해 적요가 감도는 고속도로를 홀로 걸어 온 나에게 물었다.   - 어머니를 보러 갑니다. 걱정돼서요   나는 열심히 대답을 주었고 검역원이 사뭇 정중하게 목례를 했다.   - 건강하세요!   요즘 항간에서 가장 많이 주고받는 인사를 검역원과 서로 주고 받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나는 마스크 뒤에 숨은 미소를 다시 떠올렸다. 남들이 뛰쳐나오는 병원체 속으로 다시 뛰여드는 용감한 “역행자”들의 소식이 련일 뉴스의 톱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포기를 모르고 병마와 맞서 싸우며 희망의 백신을 만드는 그들의 고전은 눈물겨웠다. 마스크 뒤에 숨어있는 견강한 미소가 결국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이 사회의 건강한 힘의 원천이 되지않을가 생각해 보았다.   마스크 사이로 벅찬 입김을 털며, 씨엉씨엉 걸음을 옮기며 시가지를 벗어나 또 한식경을 걸으니 국도 곁에 과수원이 무대장막 뒤의 진풍경처럼 펼쳐졌다. 우리의 선인들이 척박한 동토의 땅에 보습을 박고 이룩해낸 결실, 명물 사과배 밭이였다. 과수원에서 나서 자란 나에게서 이곳은 익숙했다. 봄이면 사과배꽃이 백사지 같이 환하게 피였고 가을에는 사과배 향이 언덕넘어 골골을 메우곤 했다.   봄이 되여 사과배 꽃이 피면 꽃에 수분을 해주어야 했다. 과수원의 사원들뿐만 아니라 집집에서 동원한 일가 친척들이 몰려들어 그날이 명절이였다. 작은 링게르병에 담긴 화분을 솜방망이로 찍어 꽃술에 묻혀 주곤 했다. 꽃가루 알레르기에 재채기를 해가면서 너나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열심히 수분을 했다. 그래야만 수확의 계절에 가지가 휘여들도록 사과배가 알알이 달릴 수 있었다. 그때는 화분 알레르기때문에 너나가 마스크를 착용했는데 요즘은 느닷없는 바이러스의 침투때문에 마스크의 풍경을 다시 보아야 했다. 그리고 요즘들어 바이러스의 위협에 지지름 당하면서부터 평면으로만 안일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이 3단 폴더형 설계의 마스크처럼 립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좀 쉴가 하다가 그냥 걸음을 재촉했다. 과수원이 보인다고 다 온 것이 아니였다. 어머니의 집은 무연하게 펼쳐진 저 과수원 막바지의 더기 아래에 있었다. 홀어머니를 시가지의 엘레베이트가 장착된 좋은 집에 모시려 해도, 조건이 좋은 경로원에 모시려해도 어머니는 굳이 머리를 저었다. 머리를 얹어서 여태까지 한평생 묻혀 살던, 아버지의 유골도 잠자고 있는 이 과수원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가을이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장년의 주먹보다도 더 큰 일등배를 아들 집에 전해오곤 했다. 무거운 사과배 박스를 이고 뻐스를 두번 갈아타며 오시곤 했다. 그러다 년세가 깊어져 요즘은 거동이 불편함에도 인편에 보내주시는 걸 잊지았다.   - 배가 먹기 질리고 치아가 시려 못 먹음 즙으로 갈아서 먹어도 괜찬타, 먹을만허다.   친히 만드신 사과배 시럽도 보내주셨다. 딸애가 밤늦게 공부하다가도 마셨고, 나도 회사의 행사끝에 숙취에 힘들때면 그 사과배 시럽을 마시면 한결 속이 풀리곤 했다. 그런 어머니가 요사이는 가는 귀도 멀어져 일껏 갖추어 드린 핸드폰을 아무리 울려도 잘 듣지조차 못하신다. 그러다가도 며칠이 지나서 뜬금없이 “전화왔대고나, 이궁 못 받았고나”하고 혀를 끌끌 차며 며칠 전에 드린 전화에 응답을 하시곤 했다. 바이러스가 엄습해 오자 걱정되여 전화를 드렸지만 받지 않으시는걸 보면 아마 또 듣지 못하셨나 보다.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웠고 바이러스 때문에 설 문안도 못가 본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방역용 마스크 몇장이라도 꼭 챙겨 드리고 싶었다.   드디여 국도와 농로가 린접한 곳에 이르렀다. 평소 자가차로 대여 오려면 20분도 못 될 거리를 도보로 오려니 세시간 좋이 걸은 것 같다. 란장 속에서도 서설인듯 큰 눈이 내렸고 사과배 나무가 렬을 지어 서있는 언덕과 농로는 눈 이불로 하얗게 덮여 있다.   문뜩 앞에서 누군가 오는 것이 보였다. 길에서 만난 검역원들 외에는 사람이라고는 보지 못했는데 이 눈길로 누군가 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소리로 고요에 구멍을 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천지에 깔린 백설의 시린 빛때문에 눈시울을 좁히고 언덕길로 위태위태 걸어내려오는 그 사람을 헤아려 보던 나는 문뜩 어떤 예감에 가슴이 뜀을 느꼈다. 작은 체구에 숙어든 어깨, 왜소한 몸집의 그 사람은 겨울 옷으로 꽁꽁 일신을 감쌌어도 그 체구의 륜곽으로 보아 분명 내 어머니임을 나는 느낄수 있었다.   - 어마이!   나는 엎어지듯 언덕길로 달려올라 갔다. 그리고 마스크를 내려 어머니에게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 아이고 이게 뉘기냐? 우리 큰 아덜   사람하나 없는 자드락 길에서 마주친 나를 우두망찰 쳐다보던 어머니가 나의 손을 와락 부여 잡았다.   - 이렇게 외통 길에서 만나다이, 다들 오금 무사하냐? 손네는 핵교 못가서 어떡하냐? 며누리 몸은 괜찮고? 이 란시통에 어떻게들 지내냐   어머니는 나를 만나자 바람으로 외려 당신쪽에서 걱정을 삼태기로 쏟아 내셨다.   -우린 다 괜찮습니다. 설에 문안조차 못오고 죄송합니다. 어머이   -일없다. 어쩌겄냐? 다 그놈 육시랄 “옘병”때문이지,   맨 끝가지에 높이 달린 사과배 알을 쳐다 보듯 고개를 한껏 들어 나를 쳐다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 그런데 어델 가십니까? 어머이 날씨가 찬데, 이 란시에   나는 반가이 그리고 원망조로 말했다.   - 쬐꼼 거기 가만이 있어바라   걸어 온 길이 벅찬 듯 숨을 거세게 삭이며 어머니가 호주머니에서 무언가 뒤적뒤적 거렸다. 신문지에 꽁꽁 감싼 무언를 꺼내들었다. 털장갑을 낀 손이 말째인 듯 어머니가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넣어 장갑을 벗었다. 갈수년(渴水年)의 과수나무 가지 같은 앙상한 손이 드러났다. 그 손으로 신문지를 벗겨 내렸다. 드디여 드러난 그 것은 마스크였다.   - 응, “입 가리개”다. 니들한테 줄려고 시방 갖고 가는 길이다.   시골에서는 때로 송아지 주둥이에 가리개를 하곤 했다. 설사를 하는 송아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쌀겨를 먹거나 벽을 핥거나 할때면 입가리개를 하루동안 해두곤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사람들이 끼는 마스크도 “입 가리개”라 부르곤 했다.   - 향정부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가리개 열장씩 나눠 주더라. 내사 그러께 쯤 쓰던게 있으니까, 니들을 줄려고 이렇게 가져왔다. 새물내 나는건 시내 사는 니들이 껴야 멋이지, 내사 무슨, 더군다나 이거 꼭 껴야 그 “코로나”인지, “코뚜레”인지하는 옘벵이 까딱 곁에 와 붙지를 못하지.   그러고보니 어머니는 평소에 쓰던 보통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새롭게 빨아 착용했을터지만 분명 오래동안 쓰던, 때국을 벗지 못한 마스크임이 일견에도 알렸다. 순간 나는 코잔등이 매콤해짐을 느꼈다.   - 그래 우리 한태 이 “입 가리개” 전해주려고 길을 나섰나요? 이 추위에, 이 먼길을   나는 어머니의 벗은 손에 다시 장갑을 끼여드렸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찬히 뜯어 보았다. 털수건 속 동리(冻梨) 같이 쪼그라든 얼굴, 합죽이에 종이장 처럼 붙어 있는 낡은 마스크, 원색을 알아볼 수 없게 물 간 목수건, 그리고 헤여진 신 코숭이에 묻은 흙과 눈… 당신은 정작 때국에 절은 낡은 마스크를 쓰시면서도 자식들에게 새 마스크를 전하려고 어머니는 차가 끊긴 이 먼 길을 나서신 것이였다. 나는 돋솟아 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품에서 내가 가지고 온 마스크를 꺼내들었다.   - 저도 어머이한테 마스크를 전해 주려고 오는 길입니다. 어머이   어머니가 벌을 쫓는 사람처럼 손사래를 쳤다.   - 내사 누에 고치처럼 하루 죙일 집에 백혀 있는 몸이니, 이거문 된다. 새거사 니들이 써야지   - 어머이, 요즘 이 전염병은 무서운 것이여서 평소 쓰던 마스크로는 예방할수 없어요. 꼭 방역용 마스크를 껴야 한답니다. 어머이   3층으로 돼 있는, 바깥부터 안까지 각기 방수층, 려과층, 쾌적층(舒适层)으로 만들어진, 마스크 착용시 잘 흘러 내리지 않으며 립체적 구조로 쾌적한 호흡이 가능하다는, 3d 립체마스크의 공능까지 어머니에게 설명해 드릴 수 없었다. 말해도 알아 듣지 못하 실 것이였다.   - 어머이의 “입가리개”는 제가 받을게요. 그러니 어머이도 제 효도를 받으셔야죠.   나는 어머니가 가져 온 마스크를 품에 넣고 내가 가져온 마스크 한세트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그중 한 개의 포장지를 뜯어서는 어머니에게 정히 씌워 드렸다.   -고우세요 어머이   내가 립체 마스크를 착용한 어머니를 보며 만족하게 웃었다. 마스크 속에서 어머니도 분명 웃는 듯 했다. 벌의 더듬이처럼 눈섭꼬리가 올라갔고 마스크가 움찔했다.   - 갑시다,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 내사 집이 조기 코 앞인데, 촌 길목 다 막고 검사하길래 정작에 외지 사람들은 못들어 간다. 치븐데 얼시덩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엘   어머니의 힘이 들어가 있는 손이 다독다독 나의 등을 밀었다.   - 아무쪼록 몸 건강하십쇼. 어머이   그 말을 하고나니 또 눈물이 울컥 차올라 나는 얼른 길에 나섰다.   언덕길을 내리다 다시 돌아보니 어머니는 샛길의 그 언덕 우에 아직도 서 계셨다. 새 마스크를 착용한 어머니의 모습이 새뜻해 보였다. 돌아가시라고 어머니를 향해 손짓을 했다. 어머니도 나를 향해 손을 저으셨다.   - 얼시덩 가거라, 얼시덩   멀리 서 계셨지만 어머니의 다수운 목소리가 다 들리는 듯 했다. 과수원의 자락, 조매로운 꿈 길 같은 곳에 선 어머니는 마치 오래전에 뿌리 내린 한 그루의 사과배 나무를 방불케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등 뒤로 무연하게 펼쳐진 과수원, 사과배 나무가지 마다에 눈은 소복히 내려서 쌓여, 하얀 배꽃이라도 피운 듯 하였다. 마치 봄이라도 정녕 온 듯 싶었다.   - 겨울이 왔으니 봄은 멀지 않으리!   방역 포스터에 씌여진 쉴레의 시구가 떠올랐다.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이 배여있는 마스크를 품에 꼭 간직한 채 나는 다시 먼 길에 올랐다.   “연변일보” 2020년 3월 13일    
440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댓글:  조회:552  추천:8  2020-09-08
독후감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몸이 떨려 한여름에 스웨터 가디건을 걸치고 급기야 겨울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춘자가 되었다...   작가는 역사라는 논픽션과 미래지향적인 픽션을 오가며 일제에 의해 흐려진 동아시아 100여 년에 걸친 역사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이기도 한 위안부 문제를 역사의 수면위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그의 키를 넘는 자료를 읽었다고 한다. 나 또한 작가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중앙문단의 중심에 있는 작가들조차 80년 동안 외면하고 있는 위안부문제를 소설화한 김혁의 작가정신에 박수를 보내며 학계에서도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로 현재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고 있는 후배의 건필을 기원한다.   6.25때 이승만정권도 "특수위안대"를 조직하여 한국 여성들의 몸과 성을 강제동원함으로서 미군으로부터 대다수의 여성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전쟁과 여성의 성의 동원은 젠더와 섹슈얼리티라는 민감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이며 세계 패권질서의 굴절된 표현임은 분명하다. 또 어쩌면 세계 전쟁사의 보편적인 문제는 아닌지?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되고싶다.   /어떤 페미니스트  
439    지천명(知天命)의 자치주 댓글:  조회:934  추천:11  2020-09-08
. 칼럼 .   지천명(知天命)의 자치주   김 혁   자치주성립경축대회에서 시민들과 어우러진 주덕해 초대주장     ▲  에헤라 어절씨구 좋구나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화호하네 에헤라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 자치구 세웠네…      신들린듯 구성진 노래소리 속에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창립대회가 연길시에서 펼쳐져 자치구인민정부 주석인 주덕해가 연변조선족자치구의 탄생을 만방에 선포했다.      1954년 4월,중공 길림성위와 성인민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의 규정에 근거,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그해 12월에 열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에서 자치구를 자치주로 선포하고 주덕해를 주장으로 선했다.   자치주의 성립을 선포하는 주덕해 주장     ▲  9월3일은 이제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일일뿐더러 우리민족전체의 축제의 날로 부상되였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명절의 분위기에 흠씬 젖어들어 여러가지 의미있는 행사들이 연변을 주무대로 연줄로 펼쳐진다.    올해도 9.3명절에 즈음하여 유엔세계관광조직, 유엔개발계획서와 국내 전문가들로 무어진 도시고찰단이 왕림하여 >라는 제명의 도시보급교류회의도 열고, 번영발전하는 연변의 시대적특징과 농후한 민속특색을 생동하게 그려낸 중앙TV 의《경국경성(傾國傾城》》문예야회가 펼쳐졌으며 제2기 중국.연길 국제투자무역상담회도 성황리에 개막되였다.    서기로운 가을바람속에 여느때보다 명절의 열락(悅樂)에 빠져든 자치주이다.      자치주성립일 경축대회 회장     ▲  자치주창립이래 연변은 가난하고 페쇄되고 락후한 면모를 철저히 개변하여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번영하고 민족이 단결하며 변강이 안정되고 인민이 즐겁게 생활하는 새로운 국면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근년들어 자치주는 변혁기의 진통도 더불어 겪고 있다. 인구의 대량이동으로 촌부락이 소실되고 녀성들의 도시진출과 섭외혼인으로 남녀비례가 실조되여 농촌총각들이 가정을 못이루고 그로서 인구가 마이너스장성을 기록하고 그에 이은 련쇄반응에 학교가 페교되고 있다. 과거 한세기동안 우리가 피와 땀을 바쳐 이루어왔던 공동체와 그속에 내재되여있는 가치관이 눈에 띄이게 흔들리고있다. 이제부터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피부로 음미해볼 시점에 와있는것이다.   자치주는 올해로 쉰다섯의 년령을 맞았다. 에서는 50대를 천명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의 위기해법은 천명을 아는 우리 자신에 있다. 영광스러운 전통과 우수한 문화유산을 지니고있는 우리 민족은 목전의 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여건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모두가 위기의식을 품고 민족의 현황과 미래를 재검토하고 문제점들을 착중하여 밝히면서 시종여일하게 과학적 발전관과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시달하고 경제발전전략을 전면 실시한다면 우리 민족은 지금 잠시 빠져든 진통의 수렁에서 빠져나올수 있는것이며 경제가 더욱 번영하고 생활이 더욱 유족하며 사회가 더욱 조화롭고 환경이 더욱 좋은 비전을 가져올것이다.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8- 9-3      
438    자궁회귀본능 - 김혁의 “련꽃밥”을 읽다 댓글:  조회:734  추천:3  2020-08-01
  평론   자궁회귀본능 -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을 읽다   ​우상렬     인간에게는 자궁회귀본능이라는게 있단다. 우리가 나서 자란 고향이 바로 우리의 자궁의 하나. 인간은 어디에 가든지 이 자궁을 잊을 수 없어 항상 그리워한단다. 그래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것을 외우게 된다.    제1회 길림신문 “두만강” 문학상 수상작인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은 바로 우리의 자궁회귀본능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 시작에 주인공은 페촌이 된 고향마을을 찾아간다. 그것은‘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찾는 것이었다. 어쩌면 주인공은 고향을 잊고 살은지도 모른다. 고향이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주동적으로 떠났으니 말이다. 이것이 의식세계의 직실한 보기이리라. 그런데‘간밤에 고향으로 간다는 흥분에 꺼둘려 충전을 깜박한’다. 고향은 무의식적인 자궁회귀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타향에서 고생을 하면 더 발동되는 법. 주인공을 보자.  그는 냉동창고에서 악덕업주를 만나 육체적 고달픔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모욕까지 받으며 시까름을 당한다. 그래 경남의 오지 한우농장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아내의 위장결혼이‘진짜’결혼까지 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아내와의 해후는 비극의 생생 보기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고향은 ‘한때는 제법 풍요와 번성을 자랑했던 마을이였다.’바로 이 마을에서 주인공은 마을문화관의 책상물림-화이트칼라로 일을 했고 잘 나가는 축이었다. 그래 수상도 하고 사랑도 싹 트고 마을에서 가장 고운 연꽃 같은 아내를 얻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빼 닮은 아들도 보게 된다. 한마디로 여기는 꿈이 피어나고 행복이 무르녹던 곳이다. 현실과 과거의 이런 대비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피어나는 것이 자궁회귀본능이다. 이것을 일종 향수라 해도 좋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객관적인 계기나 자극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농장주가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연꽃못이 자연히‘마을앞 커다란 자연 못에 련꽃이 무성해 련화촌으로 불리’던 고향마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시도 때도 없이 연못에 나와 자궁회귀본능-향수를 달랜다.   ‘그 감흥에 옮아 들어’“‘우리 연변에도 련이 난답니다. 두만강 홍련이라고’”는 직접적인 주석으로 된다. 여기에 농장주의“‘그럴테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고향의 제것이 더 아름다울걸세’”는 정곡을 찌르며 가슴에 와닿는다. 여기에 농장주는 한 술 더 떠“‘이보게 옌벤 나그네, 이제 제것을 완상하러 가시게. 꽃잎이 싹 다 지기전에 말일세.’”는 직접적인 추동으로 된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삶의 도리나 이치를 터득하게 되면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된다.   “‘련꽃을 마음에 들이면 욕심을 씻고 평정한 마음을 가질수 있다고 선친은 늘 말씀하셨네. 무욕의 평정한 마음은 안락과 평화를 가져다준다는데 선친께서 가르치셨던 그 간단한 리치를 난 여태 실천해 오지 못했지.’”농장주의 이 말은 바로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래 주인공이“‘나도 여태 완상할줄 모르고 살아왔슴다. 그 꽃 말임다’”고 되뇌인 것도 자연스럽다.    자궁회귀본능- 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장 아늑한 자궁 같은 고향을 그린다. 이것은 어쩌면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아름다운 못을 버리고 뿔뿔이 헤여져 떠났던것인가?’를 자기도 모르게 반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집단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음미하며 완상하게 될 때 고향은 이제 추물이 아니라 더 아름답게 안겨온다.   ‘고향의 련못은 스스로 꽃잔치를 벌리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식물, 동물 등 생명의 하모니. 그것은 유구한 자연의 원생태. 한국 한우농장의 인공적인 것보다 더 진실하고 확실하다. 物是人非-자연은 그대론데 사람은 가고 없기는 하나. 그래 결국 사장 한 장으로나마 달래보는 자궁회귀본능. 현실은 이렇게밖에 별 도리가 없다. ‘빨리, 또렷이 인화되라고 사진을 따뜻이 손아귀에 품어 가슴에 대였다./내 가슴에서 련꽃 한점이 바야흐로 피여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연꽃은 자궁회귀본능을 달래는 하나의 상징코드이다.   소설가 김혁의 ‘련꽃밥’은 식상하기 쉬운 한국제재를 정신분석학적인 자궁회궁본능이란 집단무의식으로 풀이하여 새롭다. 조선족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창출하여 좋다.    "길림신문" 2020-07-08   우상렬:  연변대학조한문학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437    억겁(億劫)의 꽃, 그 꽃잎을 세며 댓글:  조회:562  추천:11  2020-08-01
제1회 "두만강 문학상" 소설상 수상소감   억겁(億劫)의 꽃, 그 꽃잎을 세며   김혁     할리우드의 영화거장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중에 《쥬라기공원》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기술로 1억년전 쥬라기시대에 지구를 제패하다가 사라진 공룡에 대한 완벽한 복원을 보며 감탄을 련발했었다.   공룡이 살던 그 시대 함께 공생했던 식물중에 우리 두만강 붉은 련꽃이 있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그후의 일이였고 우리 신변에 공룡이 살던 1억년전의 꽃이 아직도 만개해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우리는 왜 사라진것에 대해 연연하면서 수억대의 돈을 퍼부어 컴퓨터기술을 극구 활용해 괴물을 복원해내면서도 여태껏 우리와 함께 해온 꽃에 대해서는 린색을 보이고 무관심을 보이고있는걸가? 그 꽃이 소담하게 어우러진 삶의 터전들을 버리고 홀홀히 떠나버리는걸가? 이러한 련상이 내가 이번 소설 《련꽃밥》을 쓰게 된 계기이다.   부침을 겪고있는 우리의 민족공동체, 텅 비여가는 삶의 터전과 그 터전에 홀로 남아서도, 억겁의 시련을 거치면서도 의연하게 피여있는 련꽃, 그 꽃에 대해 단지 완상(玩賞)의 여유로운 눈길로만 바라볼수 없었던것이였다.   련꽃은 깊고 더러운 곳일수록 더욱 크고 아름답게 피며 다른 종을 섞지 않는 영원한 순종의 꽃이라고 한다. 속세의 번거로움에 물들지 않는 꽃이라 하여 《군자화》로도 불린다. 련잎에 이슬이나 비방울이 앉으면 자신이 감당할만한 무게만큼 싣고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고개 숙여서 자신을 비울줄도 안다. 그래서 《비움의 꽃》이라고도 한다. 련꽃을 종자로 한 소설을 쓰면서 배우게 된 련꽃의 의미다.    그렇게 《군자화》의 자세로 글쓰기의 밭을 경운해나가려 한다.  세월이라는 꽃잎을 세고 또 세며 좀더 성숙된 완상의 눈길을 가지기 위해 고독과 갈증을 견디며 스스로의 계절을 만들어 글줄에 꽃씨를 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혀가는 일을 쉼 모르고 반복하고있다.   명리에 둔감하고 고독을 외려 달가워하는 많은 문학인들의 노력에 받들려 피페해진 문화풍토에서도 문학은 그 실추되고저 하는 가치를 멀미나게나마 이어나가고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또한 이러한 군자화의 자세들이 꽃줄기처럼 기조를 잇는다면 흔들리는 파고(波高)를 이겨내며 우리의 꽃을 만방에 향기 그윽하게 피워낼것임을 난 믿고싶다.   람루한 내 삶이 비쳐든 이야기들을 연거번거 수상작으로 뽑아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2014-05-29    
436    한 농예인의 동상 댓글:  조회:1076  추천:12  2020-08-01
칼럼   한 농예인의 동상 그리고...   김혁      찜통더위에 꺼둘린7월22일, 룡정시 로투구진 용진촌 소기마을에서 최창호 선생 조각상 설립식이 조촐하게 펼쳐졌다. 허물어져가던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가 보수되였고 최창호선생의 100년 고택도 다시 손길이 닿아 초옥의 운치를 보이는 가운데 그 고택의 뒤쪽 언덕배기에 “사과배의 선구자”로 정평되는 농예인 최창호선생의 한백옥 흉상(胸像)이 건립되였다.   최창호는 1897년 조선의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정동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선비 최병일의 아들로 태여났다. 20세기 초, 일제의 탄압에 조선 리씨 왕조의 운명이 다해가자 최병일은 일가 식솔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 1916년에 드디여 다다른 곳이 바로 그 지형이 버치 모양을 닮은 형국이여 “작은 버치골”로 불리는 룡정 로두구진 소기(小箕)촌이였다.   농예인 최창호   최씨 일가는 화전을 일구어 첫 해 농사를 지었고 지세 높고 양지 바른 곳에 8간 초가집을 지었다. 최창호네 집 뒷켠에는 그닥 가파르지 않은 언덕이 있었다. 최창호는 그 언덕에 살구, 오얏, 배, 복숭아, 찔광이와 돌배 나무를 서렬로 심었다. 그로부터 소기골에 처음으로 과수원이 들어서게 되였다. 1921년에 최창호는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가져온 여섯 대의 배나무 가지를 김치 움에 넣어 잘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봄이 되자 배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지하였다. 짚으로 싸고 삼으로 동여서 겨울나기를 시켰다. 그렇게6년째 되던 해의 봄 3그루의 과일 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세 그루의 과일 나무가 연변에서 생성된 사과배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     이로부터 사과배는 연변은 물론 동북지역과 내몽골, 화북지역에 널리 전파되였고 아세아에서 가장 큰 사과배기지인 연변과수농장 만무과원이 룡정에 조성되였다. 사과배는 국내외에 소문높은 브랜드상품으로 자리매김했고 사과배산업은 연변농업경제의 중요한 기둥산업으로 간주되였다.      한 농예인이 접목의 힘으로 거칠고 바람 세찬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지게 한 새로운 품종이 바로 사과배이다. 150여 년의 이민 정착 력사를 경유해 온 조선족이 황무지를 눈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 낸 지역 특산물로서의 사과배에는 조선족의 피와 땀, 애환이 담겨 있다. 이렇듯 이민 민족인 조선족은 중국문화의 가지를 자기 민족 문화의 뿌리에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켰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중국조선족을 사과배에 곧잘 비유한다. 사과배는 어찌 보면 자체의 특유의 생존 리념을 키워 온 조선족 문화를 형상화 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년세월을 경유해오면서 사과배는 중국조선족의 개척정신과 창조정신의 상징물로 부각되였고 사과배선조나무는 연변의 중요한 력사경제문화유산으로, 소중한 향토교재로 각광받게 되였다.   이에 룡정시정부에서는 지난 1987년 최창호선생의 호흡이 서린 소기촌에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를 세웠고 1998년에는 연변주정부와 룡정시정부에서 《사과배소개기념비》를 세웠으며 오늘에는 드디여 그 사과배의 “산파”인 최창호 선생의 기념석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2010년 필자는 최창호의 고택을 찾아 특종 "조선족 사과배 선조나무 고사(枯死)위기를 매체에 발표, 선조 사과배나무에 대한 중시를 불러일으키고저 관련 뉴스, 칼럼을 발표하고 관련 다큐특집 제작에 동참하기도 했었다.       이로서 조선족문화의 발상지 룡정지역에는 모아산 기슭에 과수원을 건설할 구상을 무르익혀 오늘의 만무과수원을 일구어 낸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연변의 첫 반일시위운동의 선두에 섰던 조선족 화가 한락연, 조선족교육의 일번지 명동학교의 창시자 김약연,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등 명사, 명류들의 기념 동상이 들어서게 되였다.    이러한 동상들은 지역사회의 력사와 정체성을 우렷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지역사회의 둘도 없는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돌을 쫗고 나무를 깎아 형상 하나를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선대 혹은 당대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을 기려 정성껏 세운 기념물과 동상은 력사를 기억하려는 량지가 있는 지성인들의 정열과 민족심의 발현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살리고 글로벌 시대 세계로 가는 조선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세우고 높이는 일이다.    명예와 공훈에 걸맞은 기념비, 동상을 적지에 건립한다면 이곳을 찾는 시민, 타지의 유람객들에게 지역사와 현대사의 산 교육의 장으로 될것이다.   민족력사의 보존, 전승, 특히 지역사회의 위상에 걸맞는 기념물의 건립은 력사관, 민족관, 국가관을 제대로 정립하게 해주며 이로서 우리의 미래를 굳건히 다지는 찬란한 기념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연변일보” 2020년 7월 24일    
435    【短篇小说】3D口罩 댓글:  조회:592  추천:6  2020-06-13
  短篇小说   3D口罩   金  革 著 郑风淑 译       对着镜子戴上了口罩。 照着电视题节目介绍的,白色无纺布那面冲里、蓝色防水层冲外、镶金属条那边儿冲上。怕戴反了又仔细看了一眼,再用手掌按了按两侧脸颊平展好,尽可能使口罩贴紧脸不留缝隙。     然后穿戴羽绒服和连着的帽子,还有脸上的口罩,装备森严的样子看起来就像科幻片里出来的智能机器人。 我戴的这种口罩,采用三层过滤,是可以阻断传染源保护呼吸器官的专业防疫用口罩,内里采用的是经皮肤过敏检测的用料,同时为使佩戴者无气闷感,设计成3D结构以扩大空间。  预防新型冠状病毒感染,需使用这类等级的3D口罩,所以最近成了人们都争相购买的必需品。   从前,女儿那个年龄段儿的孩子们,戴口罩是为了耍酷扮靓。可最近,口罩绝非什么爱好或爱美的选择,而占据了第一必需品的位置。既有自掏腰包捐助口罩的企业家,其中也有私囤口罩乘机捞一笔的无耻败类,导致口罩价格飞涨。 为了买到口罩,曾去市内挨家药房扫货,也排过两、三小时的队,翘首等待的结果,只能按规定限量买到五只口罩,然后再奔下一个药房。 如此这般,一连几天忙三火四地奔波,终于弄到全家人够戴一段时间的几十只口罩时,那成就感,简直像在无人岛的悬崖峭壁间寻到藏宝箱一般的心境。 我如凯旋将军般回到家,把口罩奉给妻和闺女。 “辛苦了,亲爱的!” “老爸最帅!”  说着,便开心地试戴口罩,如获至宝。整天憋在家无法上班上学、情绪已有些焦躁的娘俩儿,脸上竟绽放出久违的灿烂微笑。 她们哪知我买口罩的艰辛,如神话中的神农氏走遍深山幽谷寻草药,费九牛二虎之力踏遍药房的台阶。此时我只觉口干舌燥,妻从冰箱拿出冰凉的鲜榨果汁,倒了满满一杯递给我。  心胸立时被清凉的苹果梨果汁浸润,我不由得浮想起果树园里,如雪花漫洒的苹果梨花,和梨树下那张皱了的苹果梨似的脸。 “老妈那里也要送几只口罩去!”我突然提高嗓门说道,仿佛受神的某种启示召唤的信徒。 “当然得送去,可是……” 妻皱了皱眉头,“如何送去啊?区域隔离期间,车辆也禁行的。”妻忧心的口吻,仿佛我要去蹚雷区。 没错,妻说得对。与酷寒一并袭来的新冠病毒凶如猛兽,这世间人人都惊恐地关紧了一扇扇门窗。 应对这史无前例的事态,所住宅小区都进行封锁管理,城乡之间的公共汽车及一切车辆都禁止通行。母亲住的村肯定也早就和所有乡下村庄一样被封闭,外人一律不得入内。 “即便如此我也得去看看,这种情形她老人家一个人是怎么过的,再说一年一度的春节也都没去问安。” 向来贤惠的妻,一言不发地从我买回的口罩里分出一包递了过来。   这是有多久没出门了? 立春下的雪还没融化。我从扣得严严实实的帽子和口罩的缝隙间,感觉到了透进来的阵阵凉意。 出入小区需出示“通行证”,并要一一报告自己的通行路线。一户一天只允许一人出门。 几名物业管理员穿着特制的红马甲,看守着小区大门。 我拿出通行证,一五一十报告了楼栋、层、门牌号后,并登记上身份证号和电话号码。 不论守门者,还是出入居民都戴着口罩,口罩上端的眉宇间都锁着浓浓的紧张。 小区门口张贴着几块巨幅防疫宣传海报。 一副真挚表情的卡通漫画人物配着“戴好口罩勤洗手”的防疫口号;另一张海报是以武汉地标黄鹤楼前盛开的樱花,及延边特产苹果梨花为背景,写着大大的“武汉加油”字样的声援标语,有些悲壮;还有张海报摘抄的是英国诗人雪莱的著名诗句:“冬天来了,春天还会远吗?”   街上空无一人。 昔日穿梭如织的车辆、熙熙攘攘的人流、嘈杂的噪音已无影无踪。 鳞次栉比的建筑仿佛一根根冻鱼杵在那儿,走在其间,感觉像是进入了一部大片制作完成后,废弃的空荡荡布景里。此时独自穿过街市的我,恍如梦游一般孤寂。 (我们为何竟落到这般田地?) 想起早上某人上传微信朋友圈的一句话,是《大自然的反击》的作者马克• 杰罗姆•沃尔特斯警告世人:“现代社会正面临‘环境传染病’这一大自然的反击。” 疯牛病、艾滋病、非典等环境传染病,尽管是以动物为媒介感染的,但实际上导致这些疾病的罪魁祸首是为了满足欲望而“征服”自然的人类。 人们被无情的病毒所迫,在家过着并非软禁的“软禁”生活,倒是在潜移默化中养成了思索的习惯。   城乡交界处还有一次检疫。 我说出身份证号,并乖乖把额头凑近检疫员举着的类似电动剃须刀的测温仪前。 “36度5,正常!” 身穿制服紧捂口罩的女检疫员,眉毛被哈气染了一层白霜。  “这情况还出远门儿,您去哪儿啊?”检疫员冲着空荡荡高速公路独自走来的我,问道。  “去看望母亲,实在挂念她。” 我认真回答。 对方也郑重回礼:“祝您健康!” 双方互道市井近来最流行的问候语后,我继续赶路,埋在口罩内的脸上重新浮起微笑。 连日来,勇敢奔向人人撤离的病毒险境的“逆行者”们,一直占据着新闻头条。他们身处极端险境不言放弃,与病魔作斗争,为制造希望的疫苗而苦战的事迹催人泪下。 我在想,隐藏在口罩后的坚强微笑,是否会成为战胜这一次危机的健康力量之源泉?   我透过口罩缝隙,边费力地倒着气,边“腾腾”甩开步子,出了城郊又走了一顿饭功夫,便看到了国道旁边的果树园,如舞台幕布后的一道奇景展现在眼前。 这就是先人们在这贫瘠的冻土上开疆拓地的成果---延边的特产苹果梨园。 生于斯长于斯的果树园,我当然再熟悉不过。 每到春天,苹果梨花便开得洁白耀眼,秋天梨香飘漫山遍野。 春季苹果梨花开时节需要授粉。彼时,不仅果园的园丁们,家家户户男女老少齐上阵,如过节般热闹。 授粉一般用棉棒沾取装在玻璃瓶中的花粉,轻触花蕊。为防花粉过敏打喷嚏,常需戴上口罩。只有授粉成功,到了秋天收获季节才能硕果累累缀满枝头。 那时候戴口罩是防花粉过敏,可最近却因遭遇新冠病毒突袭,而重现戴口罩的风景。 同时,自从被病毒威胁所折磨,原本看起来安逸的平面世界,开始变得像眼前这三层折叠式设计的口罩一样立体化。 本想歇会儿,可脚下却不由得加了紧。见着果园并不等于到了家,母亲的家在一望无际的果园最末端坡下。 我们曾想把寡居的母亲接到安电梯的好房子,也动员过她住条件好的敬老院,可她都拨浪鼓似地摇头。她说,自从盘上头嫁过来,便在果园住了一辈子,况且父亲的骨灰也埋在这儿,还是这儿住着踏实。 一到秋天,母亲就要忙着捡选大过壮年拳头的一等苹果梨,且一定要亲自给儿子送上门。 每回她头顶沉重的苹果梨箱,要换乘两趟公交车才能到我家,拦都拦不住。即便近年年长体衰行动不便,她还不忘托人捎给我们。  “吃腻烦了或牙酸咬不动,干脆绞成汁也不错,好喝着呢!”母亲话这么说着,真就亲手做了苹果梨露送过来。闺女晚自习时喝过,我公司有应酬喝醉难受时,也常喝它解酒。   如今的母亲耳朵背,特意给她准备的手机任凭怎么响铃也听不见。等过了几天后,她才冷不丁说起“是你来电话了呀,哎咕,没接着啊!”,啧啧咂着舌,回应几天前的电话。 新冠病毒袭来,我忧心如焚,立马给她挂电话照旧没接,看来又是没听见。母亲这样真是让我心疼,加上因为新冠病毒隔离连春节也没去拜年,令我更加挂念,同时也觉着,必须给妈妈送去哪怕几片防疫用口罩,才能心安。 终于到了国道和村路交叉口。平时开车不到20分钟的路程,徒步竟走了差不多仨小时。 春日逢大雪,苹果梨树排成行的山丘和村路,盖在了一层白茫茫的厚雪之下。   猛然间,我发现远处似有人正往这边移动。除了路上遇到的检疫员外,我几乎就没看见过行人。此刻,我却分明觉察到了那个人,在纯白无痕的雪地上,“咯吱吱、咯吱吱”的脚步声打破着雪世界的静谧。 铺天盖地的白雪泛着银光,我眼晕得眯缝起眼睛,盯着如履薄冰顺下山坡那人,突然间某种预感使我心里一阵悸动。 瘦小的身子、下塌的肩膀,即便一身棉衣厚厚地裹着,单单从那身体轮廓,我也感觉得到她就是我母亲,没错儿。 “妈!” 我三步并作两步冲上山坡到了妈跟前儿,拉下口罩露出脸来。 “哎咕呀,这是谁啊?这不是我大儿嘛!” 也许母亲在了无人迹的小路上,与儿子不期而遇实在太意外,她手足无措地呆了半晌,然后猛地一把抓住了我的手。 “全家都好吗? 孙女不能上学咋办? 媳妇身体没毛病吧?真惦记你们呐,这乱糟糟的日子是咋过的?”一见面儿,母亲便连珠炮似地问这问那。 “我们都挺好。春节也没来给您拜年,是儿子不孝啊,妈!” “没事儿的啦,还不都怪那‘鬼’病嘛!”就跟盯着树梢结的苹果梨似地,母亲仰头看着我说。 “可您老这是往哪儿去呢?这大冷天儿的,疫情也这么紧?”我半喜半嗔。 “等会儿!”母亲许是来路走得太急,边大口喘气儿边在口袋里翻腾,顺手拿出一团用报纸紧紧包着东西。她似乎觉着戴厚手套碍事,夹在腋下一抽,大旱之年果树枝般干瘦的手便露了出来,然后扒开报纸团。 眼前,竟是口罩! “嗯,就是‘捂嘴套儿’,这不正想动身给你们送去哪!” 在乡下,有时会把牛犊子的嘴给套上。遇着牛犊子拉稀,为防它捡地上的米糠吃或舔土墙,就将它的嘴巴套上一天。所以,母亲把人戴的口罩也叫成“捂嘴套儿”。  “乡政府下村来给每户分了十块儿。我用前年戴过的就行,想把这些新的给你们送过去。嘎嘎新的给你们城里佬戴着才俊,我这老家伙有啥挑的?更何况,你们得戴上这个才能挡严实,那叫“新冠”的还是“老罐”的‘鬼’病近不了身呐!” 我这才注意到,母亲戴着平时用过的普通旧口罩。看来应该是新洗过,但搭眼一看很明显是旧得洗不出来,发黄。  瞬间,我觉着鼻根儿辣辣的。  “那您,这是打算给我们送‘捂嘴套’上路的?这大冷天儿大老远儿的您全不顾?” 我重新给母亲戴上手套,有多久没这么仔细端详她老人家了? 旧得看不出原色的毛围脖里,裹着一张皱了的冻梨似的脸,糊着一片薄纸似的口罩,还有破了洞的鞋尖上沾着的泥,还有雪……  自己戴着变了色的旧口罩、却惦记着给儿孙们送新口罩、不顾车辆禁行也不管路远,母亲就这样奋不顾身地动身了。 我强忍着再次涌上来的泪水,从怀里掏出自己带来的口罩。 “我也是给您送口罩来的,妈!” 母亲撵马蜂似地连连摆手: “我呢就像茧里的蛹,一天到晚呆在家,戴这个就行,你们不一样,可得戴新的才行。” “妈,这天煞的传染病挺吓人的,平常的口罩根本挡不了毒,非得戴这种防疫用的口罩才行。” 这种3D立体口罩共三层,从外到里分别由防水层、过滤层、舒适层构成,呈立体结构可以舒适地呼吸等等,这些功能都无法向妈妈说明,况且说了她也听不懂。 “妈送的‘捂嘴套’,我拿着,可您也得收下我的孝心才行啊!妈!” 我把妈拿来的口罩放进怀里,把自己带来的一包口罩塞给妈,又拿出一个撕下包装,给妈端端正正地戴好:“挺好看呀,妈!” 看着戴上立体口罩的母亲,我心满意足地笑了。看母亲那眉梢翘成了蜜蜂尾、口罩在微微打颤,就能感觉得到口罩里的她也分明在笑呢。 “走吧,我送您回家!” “送个啥哟?家就在眼巴前儿。倒是你该赶紧回去,村口都封路检查呢,外来的人也不让进。大冷天的,早点回吧!” 母亲那双有力气的手轻轻地推了推我后背。 “您千万要注意身体啊,妈!” 说出这句话,泪水再次“呼”地溢满眼眶,我赶紧扭头往回走。 下着坡回头一看,母亲她依然站在小路那边的土坡上,戴着新口罩的样子显得那样清新。  我向她摆摆手,让她赶紧回家,她也跟我挥着手:“快回吧,儿! 快回!” 我渐行渐远可母亲的声音依稀就在耳畔。   远远望去,果树园幽幽梦幻般的林子边,母亲站成了深深扎根的一株苹果梨树。 母亲背后,那一望无垠的果园,苹果梨树上,雪纷纷扬扬地飘落满枝头,开出了一树一树雪白的梨花,恍若春天已真的来了。 “冬天来了,春天还会远吗?”防疫海报上的雪莱诗句浮现脑海。 我揣紧怀里透着母亲温暖体温的口罩,重新奔向远方。   “民族文学”2020年 第6期  
434    상해탄 올드 데이스 댓글:  조회:725  추천:11  2020-04-16
  평론 상해탄 올드 데이스 -김혁의 장편소설 《무성시대》   리광일   저명한 다산작가이고 조선족의 중견소설가인 김혁의 장편소설 《무성시대》가 2018년 1기부터 2020년 2기까지 《장백산》잡지에 14차에 거쳐 련재를 끝냈다. 이로써 김혁의 여섯번째 장편소설이 완성된것이다.   김혁은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청년생활》, 1985년 8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곧이어 《노아의 방주》(1985), 《맥주 두병》(1985)을 련속 발표하였다. 1994년 중편소설 《미망의 도시》, 《적(笛子)》, 《바람 속에 지다》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중편소설창작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김혁의 장편소설창작은 2003년부터 시작되였다. 이해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창작하고 《장백산》잡지에 1년간 련재하였다. 이 작품은 어린이들의 시선으로 문화대혁명의 란장판을 그렸다. 이어서 출국붐 속에 스러진 조선족 녀인상을 그린 두번째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2003)를 창작하고 《연변문학》잡지에 1년반 동안 련재하였다. 이외에 조선민족이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조명한 장편소설 《시인》(2010), 위만주국 황후인 완용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장편소설 《완용 황후》(2013), 조선족 최초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그린 《춘자의 남경》(2015)을 창작하였다.   작가의 말에서 지적하다싶이 김염에 대한 논픽션은 많이 나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픽션은 매우 적은 형편이다. 특히 이 작품은 조선족문단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김염 관련 픽션물이고 첫 장편소설이다. 본고는 세가지 방면에서 김혁의 장편소설 《무성시대》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연기자의 일대기적인 플롯   이 소설의 시작은 “캇!”으로 시작된다. 1928년 상해에 있는 명성영업공사의 촬영장에서 영화 《목란종군》의 촬영이 한창인데 이 영화의 엑스트라로 김덕린(김염)이 촬영에 참가한다. 촬영에서도 그는 주인공 풀샷을 주는데 끼여들었기에 감독은 “캇!” 하는 쇠소리를 냈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액션!”으로 끝이 난다. 1950년 상해영화제작소에서 처음으로 제작하는 영화 《대지중광》의 주역으로 된것이다. 감독의 이 한마디에 무성영화의 대가가 다시 수은등아래에 서게 된것이다. 이 작품은 “캇!”에서 시작되여 “액션!”으로 끝난다. 즉 애송이 엑스트라 김염이 영화촬영에서 연기를 잘못해 감독이 “캇!”(중지)하는것으로 시작하여 이미 영화황제가 되여 주역으로 영화촬영에 참가하여 감독이 “액션!”(시작)으로 끝나는 작품의 구성이 주목된다. 이 작품은 영화황제 김염의 연기자로서의 일대기적인 플롯을 갖고있는것이 특징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연기자 김염의 생애는 세개 단계로 살펴볼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1910년 태여나서부터 1927년 17세까지인데 연기자가 되기전의 준비단계이다. 1910년 서울에서 의사집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가 1912년 일제의 수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2살되던 김염도 가족을 따라 흑룡강성 치치할에 온다. 영화를 보기 위해 열심히 빈 담배갑을 모은다. 담배갑 10개를 모으면 한부의 영화를 볼수 있기때문이다. 이렇게 부지런히 모아서는 영화를 보군 하였다. 저명한 경극배우 매란방이 출연한 영화 《천녀산화》를 세번이나 보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에게 불행이 따라온다. 아버지가 일제의 간첩에게 독살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였다. 어머니 홀로 일곱 아들딸을 먹여살리기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리하여 가정은 뿔뿔이 헤여지고 자식들은 친척집에 보내지게 되였다. 김염은 천진에서 사는 둘째 고모의 집에 보내졌다. 고모집에 와서도 영화에 대한 김염의 애착은 식을줄을 몰랐다. 완령옥의 사진이 박혀있는 영화월간지 《영화월보》에 빠졌고 영화에 매료되였다. 그리하여 고모부와 언쟁이 일러났는데 고모부 김규식은 시시껄렁한 영화에 빠지지 말고 소래 광산 김씨의 자손으로서 독립운동가의 자식답게 옳바른 정도를 걸으라고 을러멘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김염의 뜻을 꺾을수 없었다.  천진에서 김염은 명망높은 명문중학인 남개중학교에 입학하였고 학교운동회에서 달리기선수로 일등을 한다. 하지만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고모부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염은 영화배우의 꿈을 버릴수 없었다. 민신영화제작사의 후요 감독과 절친한 사이인 《대공보》 천진주재소 허기자의 소개장을 받고 김염은 1927년 이른 봄, 친구들이 모아준 돈 7원을 갖고 무작정 동방의 할리우드이고 당시 중국영화산업의 메카인 상해로 떠난다.   두번째 단계는 1927년부터 1932년까지인데 일반 연기자로부터 영화황제가 되기까지이다. 상해에 도착한 김염은 민신영화제작사를 찾아가 후요 감독을 만나고 사흘후 영화촬영장에 가서 엑스트라 행인 정(路人丁)의 역을 맡는다. 기록계원의 자리가 차례지지만 감독에게 코밑치성 안해 한달도 못되여 기록계원에서 해고된다. 극장지기로 취직하여 고독과 고뇌를 거듭하지만 무료로 영화를 보면서 많은 연습을 거듭한다. 이 과정에 배우의 기량을 닦은것이다. 극장에서 민신영화제작사 복만창감독을 만나고 그의 소개로 남국영화연극제작사 연극쟁이 전한을 만난다. 이 만남은 우연이지만 김염의 연기생활의 한페지를 만들어준 만남이기도 하다. 전한과 김염은 함께 연극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전한의 제작사에서는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번안해 공연하는데 한번은 극중의 요한 역을 맡은 배우가 나타나지 않아 김덕린 대타로 무대에 등장한다. 공연은 대성공을 이루고 단번에 김염은 인기를 한몸에 안는다. 그동안 김염은 전한에게서 연극과 무대연기를 배운다. 후에 《열혈남아》라는 영화에 단역 대장쟁이로 출연하지만 영화가 실패한다. 상해에 온지 1년이 되는 1928년 설날, 김염은 상해 외탄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리라 작심하고 자기의 예명을 김염이라 한다. 련화영화제작사에서 그의 연기인생에 큰 역할을 한 손유감독을 만난다. 두사람은 모두 남개중학교 출신이고 동갑이다. 손유 감독은 영화 《야초한화》의 남녀주역으로 김염과 완령옥을 기용한다. 김염은 어릴 때 영화잡지에서 보았던 완령옥을 만난다. 영화는 대성공을 이루고 히트를 친다. 이어서 《련애와 의무》란 영화에 김염과 완령옥이 주연으로 출연하는데 역시 대성공을 이룬다. 김염은 이어서 복만창 감독의 《련애와 의무》, 《일전매》, 《도화읍혈기》 등 세부의 영화에 출연하고 사동산 감독의 《은한쌍성》에 출연한다. 이제 김염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길거리를 마음대로 다닐수 없게 되였다. 그는 스타가 되였다. 1932년, 영화전문지 《전성일보》가  “중국10대 영화명배우” 투표행사를 진행했든데 김염 1등을 했고 “상해의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되였다. 또한 《전성》영화잡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명배우”, “가장 건장한 남자명배우”, “내가 가장 벗으로 사귀고 싶은 남자배우”  등 테마로 투표행사를 진행했는데 단연 김염 1등을 하였다. 김염의 등극은 상해 영화계의 르네상스를 열어갔다.   세번째 단계는 1932년부터 1950년까지인데 파란만장한 영화황제의 인생을 보여주었다. 전한이 김염의 녀성팬들이 편지를 보고 영화 《세 모던 녀성》을 만들고 손유 감독이 영화 《들장미》를 만든다. 이 영화의 녀주연은 왕인미가 맡는다. 김염과 왕인미가 만나고 1934년 두사람은 결혼한다. 1934년 손유 감독의 영화 《대로》에 김염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섭이가 영화의 주제곡 《대로가》를 작곡하며 김염이 직접 노래를 부른다. 김염은 좌익영화인으로 맹활약하며 좌익작가련맹이 성립된 1930년대는 “김염의 년대”라 일컬어진다. 그는 오영강 감독의 항일테마의 영화 《장지릉운》에 주연으로 출연하지만 영화가 국민당중앙 영화검열기관의 검열에 걸려 곤욕을 치른다. 할리우드 영화출연 제의가 들어오지만 영화가 락후한 중국과 초라한 중국인을 보여준다고 제의를 거절한다.  상해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1939년 김염은 중경에 가서 중앙영화촬영소의 손유 감독의 영화 《장공만리》의 비행사역을 맡는다. 왕인미도 영화에 참가한다. 3년간 촬영하고 개봉하자 장병들속에서 인기를 얻는다. 상해 일본 주둔군 병영에서 일본군이 영화촬영제의를 하자 거절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자 지인의 도움으로 김염부부는 향항으로 탈출한다. 다시 이들은 향항을 떠나 계림으로 피난하고 김염은 또 중경, 곤명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이들은 곤명에서 리혼한다.  일제가 투항한후 김염은 영화배우 류경의 소개로 대광명영화관에서 진이를 만난다. 김염과 진이는 사랑에 빠지고 드디여 향항에서 결혼한다. 1950년 상해영화제작소에서 촬영한 서도 감독의 영화 《대지중광》의 주역을 맡는다.   2. 력사적진실에 기초한 소설화   이 작품의 주인공 김염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때문에 작품은 력사의 현장을 비켜갈수 없다. 하지만 력사에 너무 집착하면 논픽션이 되기 쉽다. 이 면에서 작품은 력사와 소설의 관계를 잘 처리하였다. 이 작품에는 많은 력사적진실이 나타나고 특히 실존했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는 작품의 전반적인 플롯에서 중요한 공능을 하였다. 작품에 나오는 실존인물들은 고립적으로 등장하는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작품의 주선에 유기적으로 결합되며 매우 인성적으로 처리되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들은 주인공과 얼기설기의 관계를 갖고있으며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에도 직결되였다.  김염이 상해에 도착해 처음 만난 영화감독은 후요이다. 그는 씨나리오 작가이고 영화감독이다. 뿐만아니라 중국 초기영화리론의 개척자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는 《서상기》, 《위군자》 등이 있다. 이외 항일제재의 영화를 많이 제작했고 후에 싱카폴에 갔는데 일제가 강점한후 항일죄목으로 1942년 살해당하였다. 후요는 김염이 상해에서 처음 만난 영화인이고 그를 영화촬영장에 데리고 간 사람일뿐 큰 의미는 없는 인물이다. 두번째로 만난 사람은 밥통감독 복창만이다.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밥통》, 《세 모던 녀성》, 《련애와 의무》, 《목란종군》 등 영화를 제작하였다. 해방후 향항과 대만에서 영화감독으로 있었고 1974년 향항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복창만은 김염이 전한을 만나게 해준 사람이라는 점에서 작품에서 인물형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였다. 세번째로 만난 사람은 전한이다. 전한은 김염이 영화배우로 성장하는데 큰 작용을 한 인물이고 김염이 좌익영화인으로 나가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전한은 문예활동가, 중국현대연극 3대 정초자의 한사람, 극작가, 희곡작가, 씨나리오작가, 소설가, 시인, 문예비평가 등 많은 칭호를 갖고있다. 후에 중국 국가가 된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이다. 1968년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를 받아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하연은 “전한은 현대의 관한경이고 중국 연극혼”이라고 평가했고, 소숙양은 “전한은 5.4운동에서 산생한 문화거인”이라 평가했고, 조우는 “전한의 일생은 한부의 중국연극발전사”라고 평가했다. 김염이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스타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손유 감독이다. 손유는 영화감독이고 씨나리오작가이다. 청화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류학을 가서 영화제작, 촬영, 편집, 화장 등을 배웠다. 해방전에 《들장미》, 《대로》, 《장공만리》 등 많은 영화를 제작했고 해방후 영화 《무훈전》을 제작했다. “문화대혁명”기간 영화 《무훈전》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1990년 상해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김염부부가 상해를 탈출하는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오영강 감독이다. 그는 영화감독이고 씨나리오작가이다. 해방전에 《장지릉운》 등 영화를 제작하였고 해방후에는 《파산의 밤비》 등 영화를 제작하였다. 제1차 중국영화 금계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82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외 작품에서 편폭을 들여 소개한 섭이, 완령옥, 왕인미, 진이 등도 있지만 특히 주목되는 인물들은 서왈보, 권기옥, 안창남, 최용덕 등인데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기에 흥미롭다. 그리고 김염이 남경훈련소에 가입하는데 영향을 준 인물들이기도 하다. 서왈보는 독립운동가이고 한국 최초의 비행사이다. 시베리아에서 안창호, 리갑 등과 함께 군관학교를 설립해 독립투사를 양성하였다. 중국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였다. 풍옥상군벌의 항공대장, 남원항공학교장 등을 력임하였고 1926년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하였다. 권기옥은 상해림시정부에서 활동한 한국 최초의 녀성 비행사이며 남경에서 항공서소속으로 10여년간 활동하면서 항일을 견지하였다. 평양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중국 항공학교 1기생으로 공부하였다. 안창남은 한국 최초의 비행사이다. 일본에서 비행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조달하고 비행기술을 가르쳤다. 1930년 불의의 비행사고로 사망하였다. 최용덕은 비행사이다. 의렬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중국공군군관학교를졸업한후 학교 교관, 중국수상비행대장, 중국공군지휘부 참모장 겸 공군기지사령관, 중국공군기지학교 교장 등을 력임하였다. 작품에서 김염의 형상은 매우 립체적이고 풍만하게 부각되였다. 상해탄의 영화계 대 스타이지만 그의 몸에서 오만함, 거만함, 건방짐을 볼수 없다. 오히려 인정이 넘쳐나는 인물형상이다. 배우가 되려고 홀로 상해에 와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점에서 그의 강인한 성격을 볼수 있다. 그리고 성공한 후에는 동생들의 형편을 헤아려 상해에 데려다 공부를 시킨는 장면에서 혈육의 정을 아끼는 그의 둔후한 인품을 볼수 있다. 여가 시간이 나면 옥윤누나의 가게에 가서는 자건거를 타고 배달하는 장면에서는 시골사내의 솔직하면서 어딘가 귀염성스런 모습도 볼수 있다. 완령옥이 자살했을 때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정의감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고모부가 영화잡지를 불살르라고 윽박지를 때 자신이 즐기는 잡지를 끝까지 태우지 않는 무서운 고집스러운 성격도 있다. 그의 안해 진이의 증언에서도 나오고 작품에서도 나오지만 김염은 영화배우의 연기만 잘 하는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다재다능하다. 바이올린을 켤줄 알고, 의자를 만드는 등 목수일도 하고, 조각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뜨개질도 하고, 자동차 운전도 하고, 승마, 수영, 테니스, 축구, 롱구 등도 한다. 게다가 김치도 담글줄 안다. 영화황제가 아니라 잡가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인간 김염의 성격을 제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상해의 눙탕에서의 세방집 생활이다. 단돈 7원을 지니고 상해에 온 그에게 생활의 여유는 없었다. 하여 싸구려 세방집에서 살게 되는데 하루에 상해의 골목거리 음식인 썽잰보를 하나밖에 먹지 못한다. 썽잰보가게주인의 온갖 멸시와 야유를 받아가면서 푸대접을 받지만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그는 모든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한다. 심지어는 그의 예술생애의 첫 스승인 전한이 선물한 코트로 썽잰보 열개를 바꾸어 먹기도 한다. 후에 완령옥과 함께 주연한 손유 감독의 영화 《야초한화》가 히트를 치면서 하루새에 명배우가 되자 김염은 다시 썽잰보가게를 찾아간다. 가게주인이 알아보고 어쩔바를 몰라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썽잰보 100개를 사서 가게에 온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한턱 낸다고 한다. 김염의 너그러움을 알아볼수 있는 장면이다. 일반 사람들 같으면 목덜미에 힘을 주면서 호통을 치고 거들먹 거렸겠지만 김염의 몸에서 이런것을 볼수 없었다. 무명시절을 끝내고 스타로 되는 순간에도 그는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았고 단지 어려웠던 그 시절을 청산하는 하나의 행사로 처리하였다. 뿐만아니라 가게주인의 딸 쇼죠가 만들어주는 헝겊신도 반갑게 받는다. 이미 구두를 신고있는 그가 헝겊신을 신을 기회가 없으면서도 말이다. 인간 김염을 따스하게 마주하는 순간이 아닐수 없다.   3. 예술미의 추구와 강렬한 항일의식   작품의 주인공 김염은 1927년에 상해에 온다. 그가 1932년 영화황제가 되기까지 5년밖에 안된다. 그럼 무엇이 그를 황제로 만들었을가. 여기에서 예술, 특히 영화예술에 대한 김염의 끈질긴 추구와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다. 김염이 후요 감독을 찾아갔을 때 그에게 맡겨진 역은 하잘것 없는 행인 정(路人丁)이다. 영화촬영이 생소했기에 실수로 감독의 욕을 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집착은 이런 욕을 귀등으로 흘려버릴수 있었다.  “방금전 욕을 삼태기로 얻어먹은 사람같지 않은 모습이였다. 다부산즈자락을 들어 땀으로 벌창해진 얼굴을 씻으면서 덕린은 또 다른 촬영장면들을 지켜보고있었다. 주연배우들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를 이글거리는 눈속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고있었다.” “나라면 저 장면을 저렇게 연기할수 있었을가? 저 웃음은 지나치게 과장된것이였어. 지금 저 보폭은 너무 작아서 주인공의 마음을 보여줄수가 없네. 나라면 허리에 손을 얹지 않고 앞섶에 모아쥐였을 거야. 손부채질을 하기보담은 주먹으로 땀을 훔치는 장면이 더 실감날 텐데.” 이와 같이 김염은 주연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관찰과 연구를 진행했고 또한 자신이 구상한 장면들을 실제로 연기해보기도 하였다. 실제상황이 여의치 않아 먹고 살려고 극장지기로 일하게 된 주인공은 곤죽이 되도록 일을 하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곳이고 무료로 영화를 볼수 있다는 자체가 매우 중요했다. 말하자면 돈을 내지 않고 배우학원을 다니게 된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는 배우들의 연기를 연구하고 모방하고 자신의 기량을 쌓아갔다. 동시에 꼭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고 또 다짐하였다. 이런 마음은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있다. “-나 기어이 이 길을 걸으리라.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이 길을 걸으리라. 고모부 앞에서 다진 서약을 위해서라도 이 길을 걸으리라. 배우로 꼭 성공하리라. 스크린에 큼지막이 떠올라 어머니와 만나리라, 고모부와 만나리라, 형님과 만나리라, 동생들과 만나리라. 다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처럼 가문의 번영과 행복을 이루리라. 큰 배우가 되여 관객들의 갈채를 받으리라. 그들의 눈과 가슴에 꿈과 감동을 전하는 배우가 되리라.”  유명한 극작가이고 시인이며 문예비평가인 전한과의 만남은 김염의 예술의 길에서 중요한 공능을 하게 된다. 전한은 그의 문장에서 술, 음악, 영화는 인류의 3대 걸작이고 그중에서 영화는 가장 매력적이며 한낮에도 사람들을 꿈길로 유혹한다고 하였다. 김염은 이것을 외워두고있었고 이를 전한은 대견하게 생각한다. 특히 전한으로부터 연극의 모든것을 전수받을수 있은것이 다행이였다. 연기자로서의 기본적인 철학에서 아주 사소한것까지 배울수 있었다. 대사를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예술은 진보에서 이루어진다, 연기는 씨나리오에 대한 복제가 아니라 진보적인 행동의 지속과 연장이라는 가르침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법과 예술에 대한 신념을 알게 하였으며 그의 예술생활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게 하였다. 드디여 주인공의 예명이 탄생하게 된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은 김덕린이지만 상해의 외탄에서 김염이란 예명이 만들어진다. 로신의 작품집을 읽고 예명을 생각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외탄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김염이란 예명이 뇌리속에서 불꽃을 발하며 떠올랐다. 이는 작품에서 하나의 고조를 이루는 부분인데 이렇게 적고있다. “-그래, 이제 새로운 배우로 새롭게 태여나는 거야. 난 타오를 거야, 활활 타오를 거야.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쳐도 꺼지지 않을 거야. 스크린의 별로 활활 타오를 거야. 무대우에서, 무대아래에서 이 세상을 비추는 자가 될것이야. 김염, 이제 나를 김염이라 불러다오!” 주인공의 법열이고 새로운 탄생이라고 할수 있다. 김염이 풋풋하고 개성적인 연기특색과 수준을 소유하고있었지만 그것이 영화감독과의 합작이 없으면 성공의 길을 걸을수 없다. 여기서 새로운 영화예술에 대한 견해를 갖고있는 손유 감독과의 합작은 큰 몫을 하였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류학파인 손유는 당시 중국의 영화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새로운 견해를 갖고있었다. 상해의 영화계는 혁신이 필요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그 변화된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 치고박는 무협지따위는 버려야 한다, 어제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바뀌여야 한다는 견해는 주인공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당시 잘 나가는 명배우들의 분칠한 경극가면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충고는 김염의 연기특색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조언이 되였다. 따라서 김염, 손유, 완령옥 세사람의 합작으로 크게 성공한 영화들을 많이 제작하였다. 이제 배우로 크게 성공한 김염은 자신의 일기책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내가 원하면 언제나 들어갈수 있는 집이 있다는 사실과 배불리 먹을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아니 그 무엇보다 영화배우 ‘김염’이 되였다는 사실이, 나를 기다리는 씨나리오 대본이 있다는 사실이, 내 몸짓을 기다리는 촬영기와 내가 나오는 스크린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모여드는 관객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도록 행복하게 했다.” 이제 상해의 영화는 하나의 새로운 길을 걷게 되였다. 멜로영화위주로 녀성배우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던데로부터 김염을 중심으로 하여 반제, 반봉건이라는 시대적주제를 다룬 좌익영화가 흥기하게 되였고 단순한 오락에서 벗어나 문예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진정한 예술의 력역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자체의 올바른 공능을 하게 되였다. 작품에서 김염이 일본군인의 영화촬영제의에 “기관총으로 나를 쏜다 해도 난 일본영화에 출연하지 않을거요.”라고 하면서 거절하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영화황제가 된후 진보적인 인사들과의 만남은 김염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수 있는 시각을 주었다. 특히 일제의 중국침략후 항일의식은 당시 시대의 추세와 민심과 일맥상통하였으며 이는 또한 김염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원형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리하여 김염을 비롯한 작품의 주요한 진보인사들의 몸에서 강열한 항일의식이 드러났다. 김염의 항일의식은 가족배경에서 그 뿌리를 찾을수 있다.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은 조선최초의 근대식병원인 제중원을 졸업하고 조선의 첫 양의사가 되였고 세브란스병원과 병원이 운영하는 의과대학교의 책임자이다. 하지만 주목되는건 그가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이며 “신민회”의 멤버라는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사상가이고 독립운동가이며 “독립협회”, “신민회”, “흥사단”을 창립하면서 활발하게 독립운동활동을 진행한 사람이다. “신민회”는 안창호의 발기로 1907년에 조직되였으며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단체이다. 주요멤버는 윤치호, 안창호,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이며 여기에 리동휘, 리갑, 리동녕, 리회영 등이 가세하였다. 김염의 아버지는 이러한 인물이였기에 치치할에서 일본간첩에게 독살당하였다. 뿐만아니라 김염의 고모부 김규식도 독립운동가이며 신채호, 려운형과 친분이 있다. 신채호는 20세기초 력사가, 언론인, 작가,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력사학은 조선 근대력사와 민족주의력사의 출발점으로 된다. 려운형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고 정치가이다. “초당의숙”을 세웠고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가족배경에서 자라난 김염은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갖게 되였다. 이런 의식은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김염과 왕인미가 주연한 영화 《들장미》는 일제의 “9.18사변”을 소재로 반일정서와 애국정서를 불어일으키려 한 영화이며, 김염이 주연한 《대로》도 항일소재의 영화이며, 김염과 왕인미가 주연한 영화 《장지릉운》도 항일제재의 영화이며, 김염이 주연한 영화 《장공만리》도 항일제재의 영화이다.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은 일본과 중국이 합작한 영화를 만들려 하는데 이 영화는 무성이 아니라 영화이다. 그리고 김염을 주연으로 초청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김염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따라서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고 지어 총알까지 배달되였다. 할수 없이 이들 부부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향항으로 탈출하지만 향항도 일제에게 점령당하여 별수 없이 중경, 계림, 곤명으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예술을 고체예술, 액체예술, 기체예술로 구분하는 설도 있다. 조각상같은것은 고체예술이고 영화같은것은 액체예술이고 음악같은것은 기체예술이라고 한다. 여기에 비추어보면 소설은 고체예술이 될것이다. 김혁의 이 작품은 소설이다. 하지만 주목되는건 이 작품은 “액션!”으로 끝난다. “액션!”이란 시작이란 뜻이다. 소설은 결속되였지만 작품은 끝나지 않은것 같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끝난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편소설 《무성시대》는 액체예술이라고 평가내릴수 있다.   문단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인물전기소설이라 할 수 있는 윤동주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시인 윤동주”에 이어 청나라의 마지막 황후인 “완용황후” 그리고 금번작인 조선족 영화황제 김염의 예술적 일대기를 다룬 “무성시대”에 이르기까지 김혁은 픽션과 논픽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민족의 인걸들을 조명하는 전기작품들을 인물평전에 이어 픽션작품으로도 련이어 내놓았다.  그의 또  한부의 픽션인물작품을 기대해 본다.    리광일(李光一)약력:    1962년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저서 등 다수, 주편 (전2권),  논문 외 다수. 길림성 제7차사회과학우수성과상, 제6기조선족문학비평상, 해외한민족청년상 등 수상.      “장백산” 2020년 제2호  
433    열반(涅槃)의 황학루 댓글:  조회:1726  추천:14  2020-04-04
칼럼   열반(涅槃)의 황학루   김 혁       요즘 세간의 모든 이목은 온통 무한에 쏠려 있다. 혹한과 함께 덮쳐든 바이러스 병독에 사상 초유 도시봉쇄의 비극을 맞이한 무한, 그 바이러스의 병명은 “코로나” 혹은 “무한 폐염”이라고도 부른다.    병마와 간거한 고전을 치르고 있는 시민들과 의무일군들을 위한 비원과 성원이 담겨진 포스터들에는 무한의 절경이자 징표인 황학루가 자주 등장한다.   천하절경 황학루.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滕王阁), 호남성 악양의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강남 3대 루각”으로 꼽히는 루각이다.   루각을 세운 시기는 저 유명한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 루각은 오나라의 왕 손권이 초나라 류비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운 망루이다. 지금도 황학루에는 손권의 강한 의지가 남아있어 “초천극목(楚天极目)”이라고 적힌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다. 초나라의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뜻의 성구이다.       황학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화재의 세례속에 7차례나 소실되고 중건되기를 반복하면서 군사들이 망을 보던 장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루각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당대와 송대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황학루에 대해 례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 당나라 시인 최호(崔颢)가 쓴 시 “황학루”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昔人已乘黄鹤去/옛 선인은 누른 학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余黄鹤楼。/이곳 황학루만 텅 빈 채 남아있네. 黄鹤一去不复返/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白云千载空悠悠/흰 구름은 천년 동안 한가히 떠도네     시성이라 일컫는 리백도 그의 작품을 보고 황학루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내려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황학루 초입에서 만나는 각필정(搁笔亭)이 바로 리백이 붓을 내려 놓았다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다.    시 짓기를 즐겼던 모택동 주석도 역시 황학루를 두고 지은 률시가 있다.   100여년 전 황학루의 모습   황학루에는 자자한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어떤 주막이 있었는데 주인장은 어느 날 찾아와 공짜 술을 퍼마시는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없이 환대해 주었다. 거나하게 걸치고 길을 떠나게 된 도사가 밀린 술값이라며 주막의 바람벽에 누른 빛갈의 학 한 마리를 그려주었다.    "손님이 오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시오. 그러면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   도사는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닌게 아니라 주인장이 노래를 할 때마다 학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주막이 크게 번성하였다. 10년 뒤 도사가 다시 찾아와서는 피리를 불어 학을 불러내더니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후 부자가 된 주인이 도사와 학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막을 헐고 “황학루”라는 이름의 루각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리백, 백거이, 최호(崔顥), 륙유(陸遊), 장거정(张居正) 등이 황학루를 읊었고, 황학루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것으로 그 인끔을 뽐냈다. 그 기라성 같은 문인문사들의 자취가 서린 곳에 조선족 화가이자 혁명가인 한락연도 족적을 남겼다.    1937년 초겨울, 한락연은 십여년 만에 류학을 갔던 프랑스로부터 귀국했다. 당시 외국류학을 다녀온 미술가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우심화되는 상황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불탔던 한락연은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볼 사이가 없이 전운이 감도는 무한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었다.    누른 빛의 장강과 푸른 빛의 한수가 만나는 이 곳에서 한락연은 공산당의 령도아래 결성된 항일민족통일전선조직인 동북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한락연은 “동북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무한시절의 한락연     이 시기 “총회”에서 발행하는 “반공(反攻)”이라는 반월간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고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는 이들은 일떠나 일제를 소멸하자!”라는유화도 한구(汉口)의 표지성 건물인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라는 거폭의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높이 걸렸다.  황학루, 그 고풍어린 루각에 높이 걸린 한락연의 그림은 민중들의 항일의지를 크게 격려했다.   황학루 루각에 오르면 무한 3진이 한눈에 들어 온다. 한수강과 양자강의 합수목에 자리한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무한은 한구, 한양, 무창  등 린접 된 3개 도시가 합쳐져 이루어진 대도시이다.  고도(古都) 무한은 중국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적벽(赤壁), 형주(荊州) 등 력사 현장의 대부분이 무한 주위에 모여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무한은 장강 수운의 리점을 활용해 발전을 구가하며 한때 상해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곳은 또 중국현대사의 주무대로 되여 두드러진 역할을 해왔다.  중국민주혁명의 발상지로서 신해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도 이 지역에서 시작되였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거둔 혁명군의 첫번째 성공은 중국 전토로 확산되며 청조의 멸망을 불러왔다.     무한에는 지난 세기 30년대 우리의 겨레들의 반일의 자취도  력력히 서려 있다.  1938년 일제는 상해 남경을 거쳐 화중의 중심지 무한을 겁박(劫迫)하려 들었다. “항전의 수도 무한을 보위하자!” 절체절명의 순간 무한군민들의 함성이 터져올랐고 무한 삼진이 산악같이 일떠섰다.   1938년 10월10일 무한시 무창(武昌)구 자양로(紫阳路) 234호 대공중학교 강당에는 120여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군청색 군복을 입고 비장하게 창립식을 올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기발을 높이 들고 용감한 중국 형제들과 손을 맞잡아 필승의 신념으로 정의의 항일전선으로 용감히 전진하자."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하게 선서하는 대원들은 모두가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졸업생들이였다.  창립식에 특별히 중공의 대표들이 참석해, 주은래는 동방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곽말약은 문호답게 축시로 조선의용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창립식이 끝난 뒤 경축행사도 열렸다. “아리랑” 합창과 “두만강변”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창립식이 열리는 동안 밖에서 가끔 포성이 들려왔다.  무한에서 한민족의 반일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단체- 조선의용대가 세상을 향해 우렁찬 고고성을 지르는 순간이였다.      조선의용대 창립사진 동그라미 속 밝은 부분이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선생이시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즉각 포탄이 터지고 초연이 자오록이 피여오르는 무한 시내로 투입됐다.  무한 중심가에서 반일 선전전을 벌렸다.  그들은 사다리를 메고 다니며 담벽과 길바닥에 콜타르로 선전구호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 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려라”     항일표어를 쓰고 있는 의용대 전사    이 광경이 그후 중국문학사에서 문호의 반렬에 오른 곽말약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의용대원들은 네댓명 씩 한조가 돼 콜타르나 페인트로 거리나 벽에 대적 표어를 쓰고 다녔다. 모두 조선의용대뿐이였다. 무한함락 직전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뿐이였다"   곽말약이 저서 “홍파곡(洪波曲. 1979년 발간)”에서 묘술한 무한 함락시의 조선의용대에 관한 생동한 묘사의 한 구절이다.   대문호 곽말약과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이 수록된 회고집 "홍파곡"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였던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도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무한, 태항산에서의 항일력정을 세세히 기록해 후세에 남겼다.      한시나 고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루각은 흔히 세월과 력사의 견증물로 사람들의 시선 속에 간주되여 있다.  세상사의 뜬 구름과 전란의 초연을 지켜 본 황학루는 또 한번 세기의 증언자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초천극목(楚天极目)”.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호매로운 성구의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는 황학루, 그어떤 역경도 이겨내며 세월의 행간에서 넘어지지 않고 우뚝 선 황학루는 고사와 희망을 우리에게 전언해 준다.  이제 검은 구름은 걷히고 더욱 명징(明澄)해진 하늘아래 학은 다시 돌아 올것이며, 다시 돌아 온 학은 열반을 거친 루각우에서 너울거리며 새로운 전설을 춤사위에 담아 이야기 해 줄 것이다.      - 3월 5일 “청우재”(听雨斋)에서    
432    바람을 가르는 붓 댓글:  조회:1544  추천:30  2020-03-09
      워낙에 서재에 오롯이 묻혀 사는 선비의 체질이지만, 느닷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겨우내 방에 붙박힌 시간이 더 많아졌다. 요즘의 신조어를 빈다면  진짜배기 “방콕족(방에만 박혀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 돼버린 것이다.   겨울의 추위와 가세해 덮쳐든 엄슬(严瑟)한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을 엎누르며 전염병을 소재로 한 책들을 서가에서 다시 들추어 보았다.     우선 떠오른 책은 ”백년고독”으로 잘 알려진 노벨상 수상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였다.  마르케스가 1985년에 발표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유럽에서 콜레라가 창궐하던 19세기 말의 풍경을 그린다. 작품의 기본 골조는 사랑하는 녀인 페르미나와 사랑을 이루기 위해 50여년을 기다린 플로렌티노의 이야기이다. 세월의 무상함과 콜레라라는 무서운 전염병의 공포를 이겨낸건 인내와 헌신적인 사랑이였다.      다음은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다시 꺼내 들었다.  알제리의 작은 해안도시에서 수천마리 죽은 쥐들이 발견되고 사람들은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로 속절없이 죽어간다. 결국 도시는 봉쇄되고 시민들은 갇히고 만다. 사망자가 늘어나고 공포 속에 온갖 거짓 소문까지 나돌면서 도시는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당착하고 있는 상황을 다시 보게 만들어주는 작품이다. 소설에서 까뮈는 “병균은 자연이 준 것이고 그밖에 건강은 의지의 소산이다. 우리가 결코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의지이다.”라고 피력한다.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세상을 문학으로 고발했던 까뮈는 페스트라는 잔혹한 배경을 설정해, 병마는 무서운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한 자태와 이를 가능케 하는 의지라는 존재주의 철학관의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 등 작품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렬에 오른 영국작가 윌리엄 서머셋 모옴의 소설 “베일《面纱》”의 소재 또한 콜레라 속 사랑이다. 1920년대 향항과 중국의 “매담부(湄潭府)”라는 곳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아름답고 명랑한 “사교계의 꽃” 키티는 유부남 찰스에게 빠져든다. 그러다 불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찰스는 키티를 배신하고, 안해의 부정을 알게 된 세균학자 월터는 키티를 중국의 오지로 데려간다. 그런데 대륙에서는 창궐한 콜레라가 한창 만연되고 있다.  “키티는 사방에 깔린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과정에서 과거의 욕망들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미래에 대해 보다 관조하는 자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광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을 얽어맸던 잘못된 사랑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한다.”고 평론가들은 이 소설에 대해 정평한다.      이딸리아 작가 보카치오의 저 유명한 “데카메론(《十日谈》)”역시 여태 적라라한 사랑 이야기로만 읽었지만 사실은 온역을 마주하고 써낸 명작이다. 흑사병을 피해 짐싸고 피난을 나온 남녀의 10일간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보카치오는 작품의 서사(序词)에서 “병마에 시달리는 불행한 사람들의 고뇌를 덜어 주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고 밝혔다. 그의 구전문학에 대한 전승과 재난속 삶에 대한 위무의 이야기 방식은 그후의 쉑스피어, 몰리에 등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로빈손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도 런던 전역을 휩쓴 온역을 소재로 한 “온역년대의 기사《瘟疫年纪事》”를 펴내 후세에 비망록을 남긴바 있다.   이제 보니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전염병이 등장한다.  괴질이 돌아 만석군 최참판 댁 일가 대부분이 병에 옮아 죽고 몰락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병명이 바로 당시 항간에서 호렬자(虎列刺)라 불렸던 콜레라이다. “호렬자”는 “호랑이가 살점을 찢는 듯한 고통을 준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소 우리는 소설작품 속 치명적인 전염병은 완전한 허구의 대상과 동일시할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겐 거리감과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무사안일 속에 “안전한 열독체험”으로 다가왔던 소설 속 살풍경이 묵시록적 예언으로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코로나가 만연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 개연성의 출현이다.  란장 속에서도 마스크 등 보견용품을 사재기하여 자신의 괴춤을 먼저 챙기려드는 후안무치 장사군들, 그에 반해 자신의 재물을 헐어 고통에 지지름당하는 사람들에게 신심의 량식을 제공하는 이들, 남들이 뛰쳐나오는 위험 속으로 다시 뛰여드는 “의자인심(医者仁心)”의 용감한 “역행자”들… 이와 같은 소설 속에서 보았던 위기의 상황들을 우리는 지금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포기를 모르고 병마와 맞서 싸우며 희망의 백신을 만드는 사람들, 그들의 분투는 놀라웁고 눈물겹다. 전염병을 소재로 한 명화 "아스도드의 온역" 우리가 지금 겪고있는 재난을 마르케스도, 까뮈도, 모옴도 모두 겪어 왔다. 비단 겪었을뿐더러 그 과정을 작품에 옮겼다.  온역, 전쟁, 기아 등 재난들은 우리의 작가들을 사고하게 하고 그것을 기록하게 할 의지와 힘을 주었다. 신상에 닥쳐 온 재난은 역설적으로 작가들의 소재와 문체를 바꾸어 주었고, 사색을 무르익게 했으며 위대한 작품을 낳게 했다.   재난 중에서의 개체의 기억은 중요하며 그 기억에 대한 기록은 더구나 의의가 있다. 생생한 고통의 목소리와 격앙에 넘친 의지의 목소리는 시대의 증언으로 남을 것이며 경력자들의 생명의 려정과 정신적 도경을 적음으로 하여 그 기록은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  견강, 우애, 선량, 호조, 용감, 락관 등 정신을 노래하고 공포, 유약, 리기, 탐욕과 사악함을 병마와 함께 물리친 이러한 련민과 관조의 격조가 담긴 기록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시(警示)와 사고를 가져다 줄 것이다.   “재난에 대해 쓰지 않는다면 그 또한 재난일 것이다”라고 갈파했던 어느 시인의 명구가 떠오른다.  재난 앞에서 창작의 의미는 더더욱 두드러진다. 거센 맞바람을 헤가르며 흐트러지려는 붓줄기를 다잡아 다시 고누잡는다.    -“청우재(听雨斋)”에서   “연변일보” 2020년 2월 28일    
431    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 댓글:  조회:991  추천:26  2019-12-30
[만필]   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  윤동주 연구의 결정판 "윤동주 평전"의 저자 한국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宋友惠와 윤동주의 릿쿄대학 후배이자 연구자인 야나기하라가 만난 자리에 나의 인물전 "윤동주"가 등장했다.    송우혜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중퇴하고 한신대 신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이화여대 대학원 사학과(한국사 전공)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 1984년 삼성문예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 장편소설 ≪남도행≫, ≪저울과 칼≫, ≪투명한 숲≫, ≪하얀 새≫,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등이 있고, 평전으로 ≪윤동주 평전≫, ≪송창근 평전≫ 등이 있다. 또 연변지역 동포들의 삶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우리의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스페인 춤을 추는 남자』(1998) 등이 있다. 한국사 관련 론고와 학술론문으로는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조직형태에 관한 연구」,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이은. 李垠의 정략결혼연구─언론보도 (1907~1920)를 중심으로」(석사학위론문) 등이 있다.   력사적 소재 및 당대의 사회상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예리하게 시사문제를 논하는 칼럼니스트로서도 이름이 높다.   송우혜가 되살려낸 윤동주의 순결한 초상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는 1946년생으로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했다. 야나기하라 씨는 릿쿄대학 사학과 졸업생으로 윤동주 시인의 후배가 된다. 20여 년 전 시인 이라바키 노리코의 에세이에서 '릿쿄대학에 류학했던 시인 윤동주'에 대한 문장을 읽고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좇기 시작했다. 시인이 일본에 남긴 발자취를 조사하고 체포시 압수당한 장서 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릿쿄대 졸업생, 교직원과 함게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릿쿄 모임’을 설립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전후로 ‘윤동주 시인과 함께’를 매년 개최해 왔다. 윤동주가 숨진 곳에서 과거의 불행한 력사를 기억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준 이들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귀감으로 되고 있다. 기라성 같은 윤동주 연구의 장인들 앞에서 필자의 작은 책자가 초라할뿐이다. 격동의 지난 세기, 북간도 룡정에서 태여나 한반도와 일본렬도에 자취를 고루 남긴  윤동주는 아시아  문인들중 유일하게 한국, 중국, 일본에 모두 기림비가 세워진 시인이다. 이에 연구가들은 "세계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하고 있는 오늘날 윤동주는 오욕의 력사를 씻고 한, 중, 일의 새로운 뉴대를 잇는 문화사자의 역할을 은연중 하고 있다"고 정평한다.   시인이 그 고난과 격변이 세월에 쓴 시는 시대와 국경, 언어의 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시 속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별의 의경.意境은 중국의 "북간도", 한반도와 일본렬도를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아시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윤동주의 고향 룡정에서 십수년간 오롯이 시인에 대한 연구와 기림사업에 몰두 해온 필자로서는  이념과 력사의 벽을 넘어 한.중.일에서의 윤동주 연구가 더 활발하게, 더 협력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9년 12월 30일   /김혁  
430    【汉诗】鹿 댓글:  조회:799  추천:9  2019-12-30
  「鹿」   金革   有 高贵的冠 高贵的头颅 高贵的眼神 高贵的身段 高贵的腿   愿做一只鹿 飘然而自不嗔的走出 卑微的森林 优雅的赴一场 生命的派对...   2019-11-22  
429    【汉诗】归零 댓글:  조회:756  추천:10  2019-12-04
. 诗歌 . 「归零」    金革      梵文的小字头 一切生命的起源  介于人生正负之间 到了知天命 像速成班学徒一般 重新学会画圈圈   一切归零何妨? 告别喧哗,告别极乐,告别棱角 还原一个灵魂的完整   2019-11-6  
428    사람이 사람을 쓰는 일 댓글:  조회:744  추천:10  2019-12-01
칼럼   사람이 사람을 쓰는 일 김혁       일전 “중국조선족인물전 심포지엄”이 중후하게 개최되였다.   작가협회기관과  대학가 연구소와 문학지가 손잡고 펼친 심포지엄은 파란많은 중국조선족력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민족의 인걸들의 일대기를 조명한다는 의취아래 김학철, 정률성, 주덕해 한락연 등 조선족 인물들을 선정, 작자와 학자, 평론가들이 진지하게 조명작업을 펼쳤다. 문단과 학계는 이를 두고 “중국조선족인물 전기문학에 대해 다각적으로 진맥한  처음으로 되는 학술모임이다”고 정평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인물전기 문학은 지난세기 80년대 중반부터 조선족 기업인들의 창업사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추형을 보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와중에 책자로 인물전 합집이 묶여져 나왔지만 그 선정인물이 조선족인물만을 다룬 작품은 아니였다. 하지만 이들이 민족사와 직결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오자 환영을 받았다.   90년대 중기에 연변대학 정판룡 부교장의 자서전 격인 "고향 떠나 50년"이 절찬리에 련재되며 인물전의 새로운 양태를 보였고 그러다 류연산 작가를 필두로 90년대 말 이후로 인물전기 문학은 문학지와 출판계에서 다량 얼굴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인물선정분야도 다양성을 보여 예술인, 문학인으로는 김학철, 정률성, 김염, 한락연 등이, 정치인으로는 주덕해, 조남기, 조룡호, 최채, 오장숙 등이, 항일운동가로는 류자명, 양림, 최진동 등이, 교육자로는 림민호, 정판룡 등이, 사회인, 기업인으로는  석산린, 한성호, 리성일 등등의 인물전기가 창작되였다.   인물전심포지엄에서 창작담을 이야기하다     인물전창작이란 말그대로 사람을 쓰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쓴 다는 것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력사 속에 박제화된 한 인물의 내면에 육박해 그 정신세계를 빈틈없이 포착해내야 하기때문이다. 한 인물의 생애를 면밀히 추적해 그 시대와 사회를 조망해 보는 데 인물연구의 특징이 있다.    사학가들은 "력사 자체가 인물사다”라고 단언한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의 깊은 사상과 력동적인 몸짓을 남긴 걸물들의 인물전기,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 수 있다.    요즘 해내외의 여러 인물전기, 평전창작을 보면 이미 구색을 갖추었다. 스토리 텔링 인물전, 화전(画传), 그래픽 노블(图像小说) 인물전, 청소년 인물전 등 새로운 형태로 인물전 창작기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전기문학은 걸음마타기이며 그 저변이 아직도 척박하다고 봐야겠다. 인물전기 독자군과 시장은 아직 열려 있지 않고 있고 작자들의 인물전창작에는 아직 허점이 보이고 미숙한 점도 많다.    적지않은 인물전은 실제 답사와 자료의 인용, 주해, 주석달기에서 근엄하지 못하다. 어떤 인물전은 그야말로 책상머리에서 작가의 년보를 그대로 베껴내고 짜깁기를 한 장편리력서격으로 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물전 창작에 앞서 선정 인물들이 더 다양해 질 필요가 있다. 인물전기 대부분이 3,40년대를 살다간 인물들에 편중돼 있는데 력사적 균형감이 필요하다. 작가들의 필끝에 누가 선정되느냐에 따라 그 영향과 함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또 우리 작가들의 인물연구나 창작에 대한 제도적 지원 시스템도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인물전 창작자의 모두가 “50후”, “60”후로 편중돼 있고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인물전을 쓸 젊은 작가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문단에서 개인 사이트나 위쳇 계정, 모멘트로 자기 글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기능이 가능해졌다. 독자들도 감수성만 잘 건드려주면 무명인의 작품에도 크게 공감한다. 재래의 열독방식에서 벗어나 타인의 삶이 정직하고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면 함께 누릴 여유도 갖추었다.    그때그때 짧은 기지와 재치를 전하는 트위터에 란무하는 짧은 글들도 좋지만, 그렇다고 인물전기 집필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적어도 특정 분야에서 특출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역할 모델”로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 그것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 것이다.  작가들의 노력으로 유려하면서도 중후하며 치밀하면서도 품격이 있는 인물전, 력사와 지식과 정보가 담긴 사람향기나는 인물전의 출현을 또 한번 기대해 본다.     연변일보 2019-12-22  
427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회 북경에서 개최 댓글:  조회:645  추천:18  2019-10-19
“연변 문단 발전의 공간 한층 넓혀줄 거라 확신…” -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회 북경에서 개최     중국작가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개최한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회의가 14일부터 15일까지 북경에서 개최됐다.    연변작가협회 당조 서기 정봉숙을 단장으로 하고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인 김혁, 장백산잡지사 주필 안미영을 단원으로 하는 연변작가협회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조선족 대표들   회의는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단결진보의 기치를 높이 들며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사상을 깊이있게 학습하고 습근평 총서기의 문예사업, 민족사업에 대한 중요론술을 학습, 시달하며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우리 나라 소수민족 문학 발전의 려정을 회고하고 사업경험을 총화하며 우리 나라 소수민족 문학 사업을 보다 번영, 발전시킬 데 관한 조치를 연구하고 전국 광범한 소수민족작가와 문학종사자들을 단결시켜 새시대 우리 나라 소수민족 문학 사업의 새 국면을 개척하는 데 취지를 두었다.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은 개막사에서 소수민족 문학의 번영 발전을 위해 공헌한 작가와 문학종사자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나서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새시대에 중국소수민족 문학은 새로운 발전공간을 맞이했는바 광범한 소수민족 작가들은 ‘단결’, ‘시대’, ‘혁신’이란 세가지 과제를 정확히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에서는 중국작가협회 당조 서기이며 부주석인 전소천이 사업보고를 했다. 광범한 소수민족 작가와 문학종사자들은 초심을 잊지 말고 부단히 노력하고 참답게 창작을 견지해 소수민족 문학 사업의 발전을 추진하고 우리 나라 다민족 문학의 보고를 풍부히 하며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새시대의 문학작품을 써내려갈 것을 당부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첫날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감독검사사 사장 수청, 《민족문학연구》 부주필 류대선, 사천성작가협회 주석 아래의 특강을 청취한외에 제10회 모순문학상 시상식에 참가했다.     길림성 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 김인순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당조 서기 정봉숙은 17일 인터뷰에서 건국 70돐을 맞아 경사스러운 분위기 속에 이번 소수민족문학창작회의에 참가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게 느껴지고 감개무량하다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회의는 1980년에 제1회가 개최돼서부터 지금까지 6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매 한번의 회의는 모두 소수민족 문학창작의 번영과 발전을 힘있게 추진했다. 이번 회의는 내용이 알차고 풍부해서 이틀간의 시간에 많은 것을 학습했다. 이번 회의가 소수민족 지역 문학창작에 정책적 지원은 물론 발전의 공간을 한층 넓혀줄 것이라 확신한다. 대표단은 회의정신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참답게 전달해 광범한 작가, 문학종사자들이 깊이있게 학습하도록 할 것이다. 이번 회의는 향후 연변의 문학 발전, 번영에 큰 추진작용을 할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연변일보” 10월 18일   중국작가협회 철응 주석과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서기처 서기, 이족 시인 지디마쟈와    
426    “모순 문학상”시상식에 참가하다 댓글:  조회:785  추천:15  2019-10-19
       
425    “민족문학” 3종 잡지 10주년좌담회 북경에서열려 댓글:  조회:790  추천:11  2019-10-19
  《民族文学》蒙、藏、维文版创刊10周年座谈会在京举行     10月16日上午,由《民族文学》杂志社和中国少数民族作家学会主办的《民族文学》蒙古、藏、维吾尔文版创刊10周年座谈会在中国现代文学馆举行。   中国作协党组成员、副主席、书记处书记吉狄马加,中国作协副主席白庚胜,中国作协名誉主席丹增,中国少数民族作家学会常务副会长叶梅,中国民族语文翻译局局长李万瑛,《民族文学》主编石一宁、中国作协创联部主任彭学明等出席座谈。     全国唯一的少数民族国家级刊物《民族文学》于1981年创刊,随着民族文学不断繁荣,这本刊物也在不断丰富和壮大,于2009年创刊的蒙、藏、维三个少数民族文版就是一个强有力的证明。他希望《民族文学》继续办好三个少数民族文版,为培养民族文学后备力量,为人民提供更多精神食粮,为推动少数民族文学继续向前发展作出应有的贡献。   哈闻、艾克拜尔•吾拉木、陈岗龙、扎巴、拉先加、艾布、阿合买提、吾麦尔江•吾吉艾合麦提、达哇才让、阿不都拉、陈涛、张健、严英秀、金革等作家、学者,以及民族文学杂志社全体编辑等70余人参加座谈会。   (文、图/中国作家网记者 杜佳) 中国作家网2019年10月18日  
424    김혁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을 읽고 댓글:  조회:1056  추천:27  2019-09-21
  . 평론 . 세부의 충실성과 총체성의 원리 - 김혁의 장편소설 을 읽고   김호웅     김혁의 최근 력작 을 읽었다.   이 작품이 중일전쟁 때의 종군위안부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니 일부 독자들은 에로틱한 장면, 즉 성적인 욕망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읽었을 것이다. 물론 에로틱한 장면도 있고 짐승 같은 일본군에게 당하는 종군위안부들의 처참한 모습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종군위안부문제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어제와 오늘의 총체성을 볼 수 있다. 총체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중국에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는 않는다(只见树木,不见森林)는 속담이 있다. 전체가 아니라 국부적인 현상에만 집착한다는 뜻이다. 모택동도 에서 이 속담을 인용해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비판한 적 있다.    헝가리의 비평가 루카치(1885-1971)는 발자크를 비롯한 19세기 리얼리즘 작가들을 격찬하면서 그들은 단순히 꼼꼼하고 박진감 넘치는 묘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 속에 있는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총체성을 포착했다고 했다. 총체성은 작품에 반영된 현실의 부분들이 그 나름의 개별적 구체성을 지니면서도 서로 유기적 관련을 맺어 보편성의 차원에 도달함으로써 획득된다. 말하자면 인물이나 상황을 묘사할 때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개별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통일시킬 때 소박한 묘사의 수준을 넘어서는 ‘올바른 문학적 재현’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총체성은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말한다.       은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되 연변, 남경, 마쯔야마(또는 도꾜)를 배경으로 3대에 걸치는 조선족, 중국인과 일본인의 갈등과 충돌, 력사의식의 변화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게 단순한 염정소설이나 전쟁소설과 다른 이 소설의 매력이요, 성취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일본 시고꾸 마쯔야마라는 도시의 봇장 시계탑 앞에서 시작되고 봇장 시계탑 앞에서 끝난다.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조선족 청년 종혁이와 그의 후배인 아릿다운 일본 아가씨 하루꼬의 사랑이라는 틀 속에서 주어지는 종군위안부들의 이야기, 따라서 이 소설은 하나의 액자소설의 구조를 취하며 전체적으로 정교한 일제 손목시계를 련상케 한다.    수많은 작은 치륜들이 서로 맛물려 하나의 정교한 시계를 만들듯이 수많은 개별적인 세부들이 교묘하게 직조되어 총체성을 만들어낸다.    평생 종군위안부의 상처를 안고 연변의 시골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이름이 춘자라면, 이 할머니의 손자며느리가 될 일본 아가씨의 이름이 하루꼬, 즉 춘자이다. 종혁이와 하루꼬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인데 종혁의 할머니는 남경에 종군위안부로 잡혀가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하루꼬의 할아버지는 남경에서 종군위안부들을 짓밟은 일본군인이다. 앙숙이라 할까, 철천지원수가 서로 만난 셈이다. 하나꼬의 할아버지가 애용하는 파이프는 금릉(金陵), 즉 남경 산(产)인데 하나꼬가 할아버지에게 선물하고자 남경에서 사온 파이프에도  금릉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있다. 이는 중일전쟁 때 할아버지가 분명 남경에 주둔했고 종군위안부들을 다쳤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인물이나 사건, 장면, 대화, 소도구, 지어는 작중인물의 이름까지도 전반 시대상황 속에서 기기묘묘하게 련결된다. 이들은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내적 련관성을 가지고 정교하게 맞물려서 총체적인 의미를 창출한다. 뿐만 아니라 시종 현념을 깔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되 세부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개별적인 부분들의 구체성과 생동성을 보장함과 아울러 적재적소에 자유모티프를 깔아 독자들에게 필요한 력사지식과 문학지식을 주고 “적절한 숨돌리기”의 여유를 갖게 한다. 리얼리즘의 최고의 경지, 즉 세부의 충실성과 함께 전형적인 환경에서의 전형적안 성격을 창조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특히 이 작품은 풍상고초를 겪은 종혁의 할머니의 형상과 군국주의의 화신이라고 할만한 하루꼬의 할아버지의 형상도 잘 그렸다.    종혁의 할머니나 하루꼬의 할아버지는 모두 고양이를 좋아한다. 종혁의 할머니가 자기가 기르는 고향이들에게 남경에서 수난을 당한 친구들인 순화, 광옥이, 옥분이, 영신이, 혜옥의 이름을 붙여주고 눈 감을 때까지 친구들을 그린다. 그에 반해 하나꼬의 할아버지는 남경시절에 사용했던 파이프를 평생 간수하고 남경시절부터 즐겼던  옥루(玉露)라는 중국 차(茶)만을 마신다. “옥루”란 문자 그대로 여성의 성기에 맺히 이슬을 의미한다. 하나꼬 할아버자의 오리엔탈리즘 적인 취미와 향수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또한 작품의 적재적소에 다도, 하이꾸, 진달래와 같은 일본문화와 조선족문화를 의미하는 상징을 깔아 인물성격을 안받침하고 사건의 분위기를 창출한다. 다도, 나쯔메 소세끼, 하이꾸를 통해 일본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화, 경, 청, 적(和、敬、清、寂)의 철학과 휴머니즘, 예술정신을 은은하게 드러냄으로써 단순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가해자인 일본에 대한 다면적인 이해를 가져오고, 새로운 세대들의 갈등과 의식의 전환을 통해 동아시아의 새로운 연대(连带)와 평화의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는 진일보 검토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첫째는 다도(茶道)를 “차도”라고 한 것은 물론 편집의 차실이겠지만, 다도의 미의식과 본질에 대해 좀 더 따져보아야 한다. 다도의 미의식을 화, 경, 청, 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도는 본질적으로 일기일회(一期一会, 평생 한 번 주어지는 만남)의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즉 일본문화 고유의 단발성(单发性)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 벚꽃이나 꽃꽂이, 스모 역시 그러하다.  둘째는 일본의 독특한 에로스문화가 전시체제에서 어떻게 이용되었는가? 왜 젊은 병사들, 지어는 고등교육을 받은 군관들까지도 짐승보다 더 성에 집착했는지를 구명할 필요가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일본군의 사망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게 위안부가 필요했고 일본군은 성적 행위를 통해 공포와 절망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일례로 가미가제특공대는 비행시간이 20시간도 안 되는 초보 비행사들에게 출전을 앞두고 녀자들과 만나게 했다. 전투기에 목표물까지만 날아갈 수 있는 제한된 연료를 싣고 사지(死地)로 날아가야 하는 비행사들, 그들이 녀자들을 상대로 미친듯이 섹스를 함으로써 잠시나마 공포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녀자를 전혀 모르는 소년 비행사들은 능갈친 여자들 앞에서 오히려 물러서면서 빌빌 울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들 역시 전쟁의 희생품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군을 천편일률로 야수(野兽)같은 인간으로 너무 단순하게 묘사하지 않았나 한다.        총적으로  은 총체성의 원리, 액자소설의 틀, 다양한 성격과 갈등, 새로운 세대의 선택, 그리고 섬세한 소설적 언어, 기묘한 소설적 기법과 장치로 종군위안부라는 피눈물나는 역사를 증언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평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제시한 우수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여전히 역사를 왜곡하고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오늘, 이 작품은 자라나는 세대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질 수 있는 필독서로 되리라 생각한다.         작가의 건필을 기원한다.   - 2019년 3월 30일  
423    정론직필(正论直笔)의 칼럼니스트를 꿈꾸다 댓글:  조회:753  추천:21  2019-06-26
  수상소감   정론직필(正论直笔)의 칼럼니스트를 꿈꾸다   김혁   10대에 필을 들어 붙박이로 글쟁이의 길을 걸어온지 30여년 이러구러 문학상들을 두루 섭렵해 왔다. 하지만 칼럼상은 처음이다. 그만큼 우리 매체와 문단에서의 공식적인 칼럼상도 이번이 처음인줄로 알고 있다.   사실 칼럼은 나에게 익숙하다. 작가와 매체기자의 이중의 신분으로 살아왔기에 칼럼은 내가 애용하는 또 다른 쟝르의 하나였다.  80년대 “길림신문”의 초창기, 1면의 현요한 자리에 “반디불”이라는 칼럼란이 있었는데 그 란에 북향, 설봉, 각설이 등 무려 13개의 필명을 번갈아대며 이 쟝르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그외에도 지금까지 거의 모든 우리말 언론지와 문학 간행물들에 독서칼럼, 력사칼럼, 인물칼럼, 영화칼럼, 문화시론들을 련작해 왔었다.   어느덧 나는 이 문단에서 칼럼을 가장 많이 써 온 한 사람이 돼버렸고 그런 나에게서 칼럼은 삼시세끼 밥처럼 익숙하다. 물리지 않고 소박하고 친절하다, 그리고 보배스럽다.    지금은 전직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나의 의욕으로 넘치는 칼럼창작은 아직도 저돌적인 진행형이다. 그리고 수상하는 이 시각까지도 이 쟝르의 개념과 의미에 대한 사유의 절차탁마(切磋琢磨) 는 계속되고 있다.    뉴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정보의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면서 다양한 의견 표출과 실시간 소통, 공유가 가능해지고 그를 보여주는 글들이 다양한 플랫폼들을 타고 실시간 넘쳐 나오고 있다. 대중적 형식으로서의 수감, 단평, 댓글 등 “칼럼 사촌”격의 글들이 인터넷, 위챗계정, 인스타그램에 넘쳐나고 있으며 칼럼의 분야도 려행, 영화, 음악, 정치, 경제, 시사, 심리, 과학, 의학, 음식, 등 으로 점점 세분화되며 다양해지고 있다. 이를 가리켜 전문가들은 “대중평자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1880년 전후 미국에서 발생하여 “뉴욕저널”에 주간 뉴스해설의 형식으로 련재된 것이 그 효시, 칼럼은 원체 가십과 유머를 중심으로 하는 글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변혁기를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공동체사회에서 칼럼은 경편(轻便)보다는 중후한 글발이여야 할 것이다. 위기설을 껴안고 부침을 겪고있는 조선족공동체는 더구나 정통적인 진지한 언론 글에 목 말라한다.   지금은 진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회의 양태들을 보여주고 진맥하는 정론직필(正论直笔)의 칼럼의 역할이 매우 막중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저널리즘 고유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목소리의 등장에 기대를 가져 본다. 지능로봇이 글을 쓰는 시대로 세상이 아무리 바뀌여도 독자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미디어의 전달을 원한다.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다층적인 경험, 해석과 판단, 주장과 요구로 련결되는 보다 완성된 칼럼과 같은 쟝르의 출현을 언제고 바라고 있다. 또한 사회의 면면과 수요를 드러내는, 독자의 요구를 잘 담아낸 시효성있는 칼럼에 반응하고 갈채를 올릴 것이다.   여느 프로필에서 나는 소설가 외에도 력사칼럼니스트라는 자칭 직명을 굳이 붙여왔고 련작칼럼집도 책자로 펴냈었다. 나의 필은 향후에도 소설과  같은 픽션뿐아니라 애대하는 논픽션 칼럼으로도 마냥 달릴 것이다.  칼럼으로 인한 수상의 소감이 또한 편의 칼럼이 돼버렸다. 의미만만인 첫 칼럼상에 과람하게 뽑아준 관계자 여려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 2019년 6월 20일       
422    우리 문학의 가능태(可能态)와 진경을 보여주는작업 댓글:  조회:718  추천:7  2019-06-26
우리 문학의 가능태(可能态)와 진경을 보여주는작업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글 짓는 사람으로서 매양 우리 작가들의 호흡과 진미(真味)가 서려있는 신간을 받아볼때마다 은근한 희열로 팽만해 오르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더우기 그 것이 여러 작가들의 작품집이요, 작가인생의 정점이라 할 문학상수상작 모음집이라 할때 그 기쁨은 또한 가배로 되는 것이겠지요.    《길림신문》은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문화와 기업지간의 끈끈한 뉴대의 전범을 보여준 통화청산그룹 리청산 리사장의 협력으로 “두만강”문학상을 설립, 시상했고 오늘 또한 그 5년간의 성과물로 “두만강”문학상수상작품집을 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전국을 무대로 그리고 해외 조선족작가들도 적극 동참하여 기성작가와 신세대가 어우러져 투고된 우리 말 작품 수백여 편에서 소설, 시, 수필, 평론 등 쟝르들을 전방위적으로 정선해100여편에 달하는 정품으로 책자를 묶어 냈다고 하니 그 알쭌한 선정에 대한 기대로 설레이는 마음입니다.    저는 제1회 수상자이자 평심위원의 한 사람이기에 금번 작품집에 오른 작품들에 대해 다량 읽어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주지하다싶이 “두만강 문학상”은 길지 않은 년륜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계의 영향력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 동안에 우리 작가들이 펴낸 수상작 또한 우리시대의 삶과 정신을 결집해 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상의 위의(威儀)를 정착시키기 위해 로고를 바친 “길림신문”과 통화청산그룹이 이룬 결실에 작가의 일원으로 커다란 경의를 표합니다.   현하 조선족공동체는 변혁기의 소용돌이 속에 몸부림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부침 속에 문인 자신이 사회적 소명자임을 똑바로 인식할 때 문학은 빛을 발하고 생명력으로  넘칠 것입니다. 문인들은 진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필을 들어야 하며 문단뿐 아니라 온 사회가 그 일을 위해 힘을 합쳐 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민족의 정서적 교감과 비전을 재다시 고양하고, 그러한 사유와 정신이 개개인의 삶 속에 녹아들어 우리의 삶에 희망과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 문학의 역할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상매체와 온라인의 현란함 속에 읽는 것보다는 보는 것, 보는 것보다는 감각으로 느끼는 것을 더 선호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활자에 묶여 있는 문학은 점점 변방으로 밀려가는 형국에 처해있습니다.  때문에 척박한 요즘의 출판풍토에서 책 한 권의 출간일지라도 의지와 용기로 이루어진 결과물일 것입니다.  피폐한 문화풍토를 딛고 펴내는 이러한 한권 또 한권의 책자들의 출간과 그 책이 담은 메세지의 전파와 수용은 바로 부침과 리산의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의 아픔과 고민을 위무해 주고 지역과 세대를 하나로 이어주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행위로 될 것입니다.   우리 문단에서 가끔 개운치 않은 뒤맛을 남기는 문학상이나 그에 기대여 나온 설익은 작품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쥐여뿌린 모래와 같이 흐트러져 독선과 상경으로 얼룩진 문단의 부박한 풍토에서 공동의 작품집을 내는 것만으로도 이즈음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의 파장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작업들이 지금 우리의 문학이 어데까지 와 있는지를 인증하고 문단의 화합과 번영에 촉매물로 되리라는 소망과 믿음도 가져 봅니다. 이렇게 어렵게 나오는 책자들을 잡음이 끊이지 않는 우리 부끄러운 문학진영의 속좁음을 떨쳐내는 소중한 마음으로 펼쳐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나올 작가와 작품들의 가능태(可能态)를 보여주는 그런 책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지난번의 “두만강”문학상 시상식에서 저는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인 이황의 시조 한 수로 청산그룹과 “두만강”문학상에 대해 은유해 읊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역시 푸른 산과 푸른 강물이 나오는  황진이의 시 한귀절로 저의 수감록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청산(青山)은 내 뜻이오, 록수(绿水)는 님의 정이니   록수가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한낱 님을 향한 사랑의 일편단심을 보여준 시 같지만 작품은 대구의 형식을 통하여 산과 물,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표상하면서 “항존(恒存)”과 “불변성(不变)”을 읽어내고 그것을 충의정신과 련결시키고 있는 명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변하지 않는 뜻과 자세로 우리 문학의 용용한 흐름의 한 진경(眞景)을 지켜나가고 이어나가기를 바래봅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6월 20일  - “두만강”문학상수상작품집 출판발행식에서 한 축사       
421    妈妈与UFO 댓글:  조회:909  추천:11  2019-05-14
  诗歌 妈妈与UFO 金革   那一年 我第一次梦到ufo 像锅盖, 像易碎的瓷器 一种恐惧和一种希冀 携着手螺旋式上升 那天妈妈病走了 童年的我深信ufo把妈妈带走了     昨晚又梦到了ufo 那盛满月光的锅盖 在我的白发上空旋转 传出渺渺天宇里带来的声音 以音速或光速问到: … 孩儿 你吃饱了吗?  我的心碎了。   2017- 6- 9   엄마와UFO 김혁   꿈에ufo를 보았다. 밥솥 뚜껑 같은, 쉽게 부서지는 사기 그릇 같은, 두려움과 호기심은 내 동공에 잠간 머물다 서편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Ufo를 처음 보던 날 병상에 누웠던 엄마는 가셨다 동년의 나는 그렇게,  ufo가 엄마를 데려갔다고 믿었다.   꿈에 ufo를 보았다, 밥솥 뚜껑 같은, 쉽게 부서지는 사기 그릇 같은, 둥근 기체에 빛무리 가득 싣고 온ufo는  내 백발의 머리우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내 동년을 싣고 온 Ufo는 빛의 음속으로 천계에서 온 소리를 전해 왔다.    - 얘야, 밥은 먹고 다니냐?   Ufo는 서편 하늘로 날아가 버렸고 내 마음은 사기릇 처럼 부서져 버렸다.    2017- 6- 9
420    <춘자의 남경> 민족의 상흔 보듬다 댓글:  조회:767  추천:10  2019-04-30
  .대담. 연변인민방송국 작가 김혁과의 대담. 민족의 상흔 보듬다 - 화제의 그 소설 창작경위 알아보다.   4월 28일  아침 7:20분, 오후 4:00 AM 1206과 FM 94.9 저녁 9:05 FM 102.3   문: 안녕하십니까? 진행을 맡은 프로듀서 최명광입니다.    요즘 우리 문단에 화제가 된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조선족문단의 저명한 소설가인 김혁소설가님의 장편소설 인데요, 소설은 지난세기 20년대 북간도지역에서 일제에 의해 자행된 과 조선인, 중국인 위안부들의 참상 그리고 남경대학살 현장을 핍진하게 재현했습니다.  소설은 조선족문단뿐만아니라 중국문단에서도 최초로 호흡이 긴 서사로 일본군 위안부 소재를 소설화하여 중국당대문학사의 한페지를 장식했습니다. 오늘 에서는 장편소설 저자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소설창작 의도와 창작과정을 여쭈어 보겠는데요, 작가님을 모시기전에 먼저 그의 주요작품과 수상경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소설가 김혁은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 《노아의 방주》 등을 발표 하면서 문단에 데뷔! 그뒤 꾸준히 필밭을 가꾸어 지금까지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완용 황후》, 《시인 윤동주》, 《춘자의 남경》,《무성시대》등 6부와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페스카마호 사건”, 인물칼럼집 "윤동주 코드", 인물전 "윤동주 평전", “한락연 평전”, “송몽규 평전”,"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등을 출간, 발표. 김작가는 지금까지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상, 해란강 문학상, 연변주 진달래문학상, 장백산 문학상 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 현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분과 주임을 맡고 있으며 사단법인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묵직한 작품들을 펴냈고 수상경력도 화려합니다. 네, 김작가님을 모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 네, 반갑습니다.    문:《춘자의 남경》은 작가님의 여섯번째 장편소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사이 금방 또 일곱번째 장편소설을 탈고 한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곱부나 되는 장편소설을 창작하신것도 대단하지만 이번 작품은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 큰 이슈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즈음 문단과 방송계에서 화제로 되고 있는《춘자의 남경》은 어떻게 창작되고 어느때 어느 간행물에 발표 된거죠”   김: 네,《춘자의 남경》은 조선족의 권위문학지인《연변문학》지에 2015년 1기부 터 1년간 련재됐고 지난해 10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됐습니다. 작품은 3 0만 자의 분량속에 “뜨거운 감자”격인 소재의 일본군위안부와 전대미문의 남경대 학살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문: 소설 스토리에 대해 요약해 얘기해주시죠.   김:  《춘자의 남경》은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되 지난 세기 2,30년대에 연변에서 일제에 의해 자행된 노루골 참안과 남경에서 자행된 남경대학살 사건을 곁들어 다루고 있습니다. 연변, 남경, 도꾜를 배경으로 3대에 걸치는 조선족, 중국인과 일본인의 갈등과 충돌, 력사의식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꾜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조선족 청년 종혁이와 그의 후배인 일본 아가씨 하루꼬는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방학기간 하루꼬를 데리고 처음 하게 되는 연변행차에서 종혁은 평생 연변의 시골에 살고 있는 자신의 할머니 춘자가 바로 종군위안부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름아닌 하루꼬의 할아버지가 바로 남경에 출전했던 일본군인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시련 속에 종군위안부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문: 소설을 보니 위안부제재로서 아주 방대한 스케줄이던데 어떻게 창작하셨는지 그 창작경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시죠.   김: 네. 사실 이 작품에 대한 창작충동과 구상은 어느 한번 뉴스를 시청하는데로 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몇해전 버릇처럼 중앙방송의 일곱시 뉴스를 시청하다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이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작가에게 오는 령감이란 그야말로 번뜩이는 혜성과 같은 것인데 전대미문의 남경 대학살에 게다가 그 잔학상으로 이미 세상에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라는 그 두가지 사 건의 조합이 강렬하게 저의 뇌리를 때렸고 순간 어떤 창작령감이 저의 충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날 나는 이미 구상을 마무리한 다른 소재의 장편을 미루고 이 소재를 장편화하 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장순여(张纯如)라는 미국계 중국인 르포작 가입니다. 작가이자 사학가인데 남경대학살에 대해 저술한 르포로 유명합니다. 그녀 가 저술한 장편르포 “력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는 해외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켰습니다. 1937년의 그 겨울, 남경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 그 만행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린 보고서였습니다. 저자는 섬세한 필치로 남경의 대학살을 이야기했고 또 일본이 어떻게 력사속에서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 망녕되게 시도했는지 낱낱이 밝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순여의 량심적인 집필은 일본 극우세력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그들로 부터 끈임없는 협박을 당해 왔던 장순여는 정신적 고통을 못이겨 2004년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문: 참 안타깝군요.   김: 이 작가에 대해 중앙텔레비죤방송국 다큐프로에서 보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녀의 문명(文名)을 알린 이 장편르포를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습니다. 저자 장순여는 각종 기록과 생존자들의 인터뷰 자료등을 통해 일본군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폭력을 마치 공포소설을 보는것 같은 끔찍한 문체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희생자인 중국인의 관점에서, 미국과 유럽의 시각에서, 다각적으로 남경의 대학살을 이야기했고 또 일본이 어떻게 력사속에서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 기도(企圖)했는지 낱낱이 밝혔습니다. 부피가 두터운 르포를 읽으며 혹한에 들린듯 부르르 진저리를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는 나의 엄청 많은 열독리력 중에서도 자주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떨림이였습니다.   문: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해 세세히 파헤친 르포를 읽고서 소설창작 충동을 느낀것이지요?    김: 이뿐만이 아닙니다. 어느 한번의 력사 답사에서 얻은 소재가 나에게 창작의 령감을 더해 주었습니다. 저는 조선족력사에 관심을 갖고있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10여년간 민족의 력사와 애환이 배여있는 유적지를 답사해왔습니다. 그중 한번은 우직한 답사를 강행한적 있습니다. 경신년 대참안이 일어난 장암동으로 향한 답사였습니다. 장암동은 우리 말로 노루골이라는 곳으로 룡정시 외곽에 있는 작은 부락입니다.  룡정시 동성용진에서 동남쪽으로 다섯시간 가까이 수십리 산길을 톺아 겨우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장암동에서 수난자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다시 먼먼 산길을 되돌아섰습니다. 발에 물집까지 생겼고 힘에 부쳐 그자리에 주저앉는 동행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나 가는 농부를 붙잡고 사정사정한 끝에 경운기를 삯내여 타고 힘들었던 답사를 겨우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유적지에서 우리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피부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제는 민가와 학교와 교회를 깡그리 불사르고 남정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성차지않아 녀인네들이 눈물로 묻은 시체를 다시 파내여 소각하는 귀축같은 “이중학살”을 저질렀습니다. 답사를 마친 뒤에도 따끔거리는 발의 통증은 길에 나서기도 힘들 정도로 며칠 련속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보다도 일제가 장암동에서 자행한 만행에 대한 기억이 더욱더 나의 신심을 오래도록 괴롭혔습니다.    문: 집필하기 위해 작가님은 사비를 털어가면서 직접 남경대학살 현장까지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 네 지난 2014년 가을, 저는 남경으로 향했습니다. 사비를 팔아 굳이 남경으로 향했던것은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남경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터미널 표시판과 지하철 도어의 전광판에 그리고 네거리 곳곳에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가는 선로가 뚜렷이 표기돼 있었습니다. 기념관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서 커다랗게 새겨져있는 “300000”이라는 수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나게, 강렬하게 찔렀습니다. 그것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였습니다.  “100인 참수경쟁”을 벌린 일본인 장교, 잘려져 뒹구는 중국인의 머리와 팔 다리, 산 사람을 과녁삼아 총검으로 찌르고 생매장하는 광경… 일본군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만여점의 자료들이 무거운 침묵과 간간의 흐느낌소리가 깔린 기념관내에 전시돼 있었습니다.  1937년 12월 13일 고도(古都) 남경은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졌고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 이후 한달여 동안 적수공권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륙했습니다. 남녀로소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고문, 강간, 생매장 등으로 끔찍한 처형 방법도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 잔인함이란 차마 입에 담을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세계사적인 참극입니다. 인류사에 이처럼 짧은 기간에 무차별적인 살륙전을 벌린 사례가 없습니다. 한개 도시의 일원(一圓)에서만 자행된 만행은 단기간에 저질렀다는 점에서 나치의 학살을 릉가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전람이 거의 끝나가는 기념관의 출구쪽에는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작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대학살 당시 12초에 한 명씩 살해당했음을 상기시키는 소리였습니다. 그 숨통 죄는 듯한 시간의 소리를 한초 한초 헤며 나는 또 한번의 혹독한 떨림을 경험했습니다.  남경대학살은 종전후인 1946년 이 사건을 다룬 남경군사법정에서도 명백하게 확인된 참안입니다. 그리고 남경대학살의 전범들은 남경군사법정과 도꾜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량심있는 사람들만이 이를 인정할뿐 남경대학살은 “중국인의 환상이다”, “학살은 없었다”는 뻔뻔한 부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부인하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년전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습니다. 위안부 배상촉구문제는 1992년 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시작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이를 랭랭하게 외면하고 있습니다. “위안부는 자발적인 성매매이다”며 그 오욕의 력사에 대해 궤변하고 세탁하려하고 있습니다.  남경대학살의 부인에 이은 후안무치한 궤변의 연장입니다. 그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들중에도 역시 중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펴낸 유명한 일본녀류작가도 있습니다. 일본 극우세력의 대오속에는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들도 적지 않습니다. 거개가 일본에서 유명 짜한 작가들이고 제가 한때 좋아했던 작가들도 있었습니다. 동업자로서 그 퇴행적인 사유에 큰 유감과 분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 그건 력사왜곡이지 않습니까? 작가는 자신의 량지를 지키고 그걸 써내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뻔뻔스런 행태가 있단말입니까?    김: 네, 그렇죠, 력사를 왜곡하는 그들의 역주행에 소설가로서 커다란 유감을 느껴 나는 우리의 간행물들에 련이어 관련 비판 칼럼을 여러 편 발표하기도 했었습니다.   그와중에 “력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이 외려 그 력사를 다시 기억해 내고 기록하게끔 한 소설가의 창작충동을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영욕이 교차하는 무대인 남경, 통한이 서린 땅에서 나는 여러가지 아픔이 동시다발적으로 덮쳐드는 트라우마를 대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연변의 노루골 참안, 남경대학살 그리고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  이 부동한 곳, 부동한 사람들이 꼭 같은 사람들에 의해 겪은 수난의 아픔들이 련결고리가 되여 나의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질성의 아픔들이 올올이 얽혀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홀로 남경에서 돌아오는 고속렬차에서 나는 그 아픔들을 꼭 그려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다졌습니다.  어떻게 쓸가하고 막연하게 그리고 환몽처럼 머금었던 생각들이 어설기 얽혀져 그 한꺼번에 형체를 이루며 뇌리에 하나 둘 떠올랐습니다.    문: 구체적인 창작과정은 어떠했는지요? 력사 대사건을 필끝에 담아내는 작업이였기에 고된 작업이였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김: 돌아와 서재를 뒤적여 보니 내가 소장한 작품들중에 위안부소재의 작품은 몇부 안되였습니다. 인터넷을 들여 검색해봐도 뜻밖에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적지 않았으나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더러 있었으나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지요.  그중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간직한 이들의 아픔을 위배한채 위안부 테마를 상술에 리용한 작품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어두운 우리 민족 현대사의 희생자들로서 전쟁을 통해 인간의 인권이 어떻게 유린됐는지 확인시켜주는 산 증인들입니다. 하지만 위안부의 몸을 노리개로 바라 본 이런 작품들은 력사의 진실에 대한 재조명은 커녕 멍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슴에 다시 못질하는 행위로 볼수 밖에 없었습니다. 충분히 력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을 잊고 더욱이 그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망각과 상혼을 쫓는 세태가 부끄러웠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민족 작가들이 쓴 소설작품은 더구나 적었고 외려 일본이나 미국쪽에서 쓴 작품들이 몇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성이 들쭉날쭉해 수작(秀作)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중국과 조선족 작가들의 이 소재에 대한 소설작품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었습니다. 위안부 소재의 소설작품이 일본 본토작가의 작품이 있는데 반해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없는데 대해 놀라움을 느꼈고 창작의 립지를 더 굳히게  되였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지성화된 기계적 감정에 길들어 있는 우리 작가들과 가련할 정도로 적은 독자군은 이런 제재에 흥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문: 력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명구도 있는데 우리의 력사를 외면하는 안타까운 풍조네요.   문: 네. 그럼에도 소설, 인물전, 칼럼, 기행수필등을 동원해 우리의 영욕이 엇갈린 력사를 조명하는 나의 작업은 이 십수년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부의 장편을 펴내고 다음 소재에 대한 선택에 심려와 숙고를 거듭하던중 여섯번째 장편소설의 소재로 단연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소재를 골라잡았습니다. 그 력사적 대사건의 들머리에 바로 우리 신변에서 일어난 장암동 참안도 곁들어 재현하기로 했습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진술,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문서, 르포 등 갖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강렬한 붓터치로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력사의 질곡에 붙매였던 그녀들을 대상화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작품을 써내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온 작품에서는 20년대 연변지역에서 자행된 ‘노루골 참안’과 한인, 중국인 위안부들의 참상 그리고 말미에서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의 현장을 재현해 보이고 있습니다.   문: 네, 실로 비허구적인 픽션과 허구적인 논픽션 작품을 익달하게 다루어 나온 큰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작가님도 한때 매체에서 활약했던 기자출신이라고 들었는데요.   김: 네. 비교적 일찍 매체에 입문했지요. 스무살에 “길림신문”사에 입사했고 그후로는 연변일보”등 매체에서 20여년간 기자사업에 종사했었습니다.   - 문: 그와중에 또 우수한 보고문학작품들을 펼쳐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혁 작가님은 1999년경에 일부 몰지각한 한국들인의 사기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습니다”를 집필, 출간했습니다. 그 르포집이 수천부가 팔려 당시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킨적도 있었습니다. 지난 해에는 또 한국어선에서의 조선족선원들과 한국선원들지간의 살인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페스카마호 사건”을 다루어 다시 한번 이슈를 일으키기도 했지요.    김: 네. 소설쓰기와 병행해 매체에서 20여년을 기자직으로 일해왔기에 저는 르포가 갖는 매력에 대해 십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같은 예술화로 허구된 작품도 좋지만 실화와 같은 비허구 작품은 제가 아직도 애대하는 쟝르입니다.   문: 력사소설을 쓰려면 현장답사와 더불어 자료수집 같은것이 선행 되여야 하는데 작가님은 어떻게 착수하셨는지요? 김: 네. 《춘자의 남경》의 집필을 앞두고 2014년 하반년을 옹근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의 자료를 수집하는데 바쳤습니다.  남경에서 돌아와서 수십부의 문사자료집과 피해 당사자들의 진술서는 물론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와 다큐, 드라마도 수십편 찾아보았습니다. 일본군국주의 실상을 깊이 료해하기 위해 수백 만자에 달하는 대하실록소설 “태평양 전쟁”도 읽었습니다.   문: 그중에 작가님이 감명을 받고 보기에 수작이라 생각되는 작품 몇편 소개해 주시죠. 김: 네. 소설을 만드는 과정에 키를 넘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료더미와 관련연구저서들을 통독했고 그 진실하고 소중한 자료들이 내 소설의 얼개를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와다 후미코라는 일본작가의 ‘빨간 기와집’ 그리고 한국작가 윤정모의 ‘에미이름은 조선삐였다’, 미국작가 모헤이더의 ‘난징의 악마 ’등 이 소재 관련 몇부가 유난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중국작가 엄가령의 남경대학살 소재 ‘금릉 13채’는 이미 몇해전에 읽었지요. 장예모 감독의 제작으로 영화도 나와 큰 센세이숀을 일으킨 작품이지요. 이 작품을 보고 읽고 소설독후감과 영화평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소설로서는 이 몇부가 작품성이 들쭉날쭉한 이 소재의 작품들중에서의 수작(秀作)이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조선족 학자들인 김성호의 실화 “종군위안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9년), 강용권의 기행문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과 오스트랄리아 얀.르부 오헤인의《침묵의 50년 한 위안부의 자술 (沉默50年:一位原“慰安妇”的自述》, 일본작가 이시가와 이쓰코의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 다니엘 최의 “나는 조선의 처녀다- 눈물로 쓴 정신대 위안부 이야기” 등 연구저서들이 내가 하나의 새로운 소설작품으로 픽션화하는데 특히 도움이 되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자료들이여서 일일이 출처를 렬거하지 못하지만 관련연구를 선행한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드디여 필을 들었습니다. 력사의 질곡에 갇혔던 불운한 그녀들을 대상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 싶었습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저 했습니다.    문: 네 실로 많은 작품을 읽었고 꼼꼼히 준비하셨네요.  김혁작가님은 으로 2017년 제25회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동포작가들 중 문학적 공적이 큰 작가들에게 시상하는 비중이 큰 이 상의 수상은 조선족문인으로서는 김철시인 등에 이어 8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리고 은 중문으로도 출판되였지요? 김: 네,《춘자의 남경》은 중국작가협회에서 제정한 소수민족중점번역지원작품으로 선정되여 연변의 번역가 근욱녀사에 의해 중국어번역을 마치고 북경 작가출판사에 의해 올해 1월초에 출간되였습니다. 또 지난해 12월 “춘자의 남경”은 아리랑 방송에 의해 라지오 소설로 개편되여 전파를 타게 되였습니다.    문: 력사의 진실에 내장된 인간군상을 생생하고 력동적으로 그려낸 장편소설 은 학계전문가들의 높이 평가하는 수작입니다.  다음은 연변대학 조한문학학원 우상렬교수의 평을 들어보겠습니다.    연변대학 조한문학학원 우상렬교수입니다.    우상렬: 총적으로 김혁작가의 장편소설 은 다양한 인물성격과 극적 갈등, 그리고 섬세한 소설적 언어, 기묘한 소설적 기법과 장치 로 종군위안부라는 피눈물나는 역사를 증언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평화와 발전의 미래를 예술적으로 제시한 우수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은 조선족문단뿐만 아니라 중국의 당대문학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주제령역을 승화시킨 중후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특히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여전히 력사를 왜곡하고 있는 오늘, 이 작품은 자라나는 세대들이 올바른 력사인식을 가질 수 있는 필독서로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문:  교수님들의 평을 잘 들었습니다.  네, 불과 십여년사이에 김혁소설가는 여섯부의 장편소설과 두부의 장편르포, 세부의 인물전기를 발표, 출간했습니다. 거의 한해에 한부 꼴로 펴낸 셈입니다. 거기에다 칼럼, 명상록, 소설, 편찬저서들도 곁들면 이 동안 그의 창작량은 그야말로 문단의 평론가들이나 원로들이 격찬할만큼 “전무”할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가 평론가들이 평하다싶이 “민족사의 행간에 굵은 획을 그은 묵 직한 사건과 걸출한 인물들을 소재로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극적인 스토리의 표현 이 돋보이는 서사적 작품”들입니다. 작가님이 다른 쟝르보다 력사작품에 더 심혈을 쏟는 리유는 무언가요?   김: 네. “력사라는 거대한 거푸집 안에 민족의 스토리와 애환을 무늬결 섬세하게 새겨넣은 력사물에 대한 작업이 요즘 내가 하는 전부의 일입니다.” 그동안 저는 력사의 대사건 속에서 부침하는 소인물들의 나름의 서사를 보여준 장편물들을 꾸준히 창작해 왔습니다. 저의 7부의 장편소설중에서 5부가 바로 력사소재에 편중한 창작물입니다.  첫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라는 홍역을 치루는 과정에서의 농도와 줄기가 다른 민족집단의 아픔을 아이들의 시각에서 다루고자 했고, 이어 “시인 윤동주”에서는 고향이 낳은 시인 윤동주의 간도, 경성, 후쿠오카에 족적을 남긴 젊은 문사의 고뇌의 족적을 더듬어 보고자 했고, “달의 몰락- 완용황후”에서는 연길감옥에서 숨진 중국의 마지막 황제 완용의 비사로부터 그의 마지막 역이였던 위만주지역의 이야기를 더듬어보고자 했고, “무성시대”에서는 지난세기 30년대 상해의 조선족 영화황제 김염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역시 력사물과 시대극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 연장선에 바로 “춘자의 남경”이 있습니다.  내가 여느 조선족 작가들과는 달리 유난히 력사물에 천착하는 까닭은 서구나 중국의 판타지에 환혹돼 있는 우리의 독자들에게 한민족과 조선족의 생성과 발전의 력사를 알리기 위함이였다.  평소 두 종류의 맥락으로 소설을 쓰는데, 하나는 객관적인 현대 조선족의 도시진출과 출국으로 이어진 리산의 삶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뿌리인 조선족 관련 이야기입니다.  애초에는 나역시 초현실주의, 판타지 등으로 조선족 문단에서 쟝르와 문체적 실험을 독보적으로 해왔지만 조선족 이야기를 쓸 때면 리얼리즘수법에로 다시 귀환해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의 결과 무늬를 우리의 정서로서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민족의 생성과 현재와 미래를 우리의 학자들 그리고 작가들은 경험적, 문헌적, 지식적, 예술적으로 적극 구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의 현재의 처경과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래일의 좌표를 구사하며 목전의 진통을 누르고 나아 갈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결국 력사와 인물을 기록하고, 력사에, 후세에 그 생명력을 불어넣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처해있는 민족만의 정한과 상흔을 가진 력사적 시간과 인물들을 오늘에 다시 불러내, 생생한 숨결의 감동적 인간상으로 재탄생시키는 일은 아무래도 문학과 예술의 몫일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락인이 찍혀 있는 민족작가로서 작가의 몫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소명의식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쓰고자 합니다.    나의 이러한 작업들은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 인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어제날과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 보면서 그 와중에 오늘의 변화하는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갖추기 위한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의 발로에서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민족의 정체성을 알고 민족의 대사기를 알며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들을 픽션 혹은 논픽션으로 만방에 알리는 이러한 작업이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氣)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 것이라 저는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문: 방금 김작가께서 하신 우리의 독자들에게 한민족과 조선족의 생성과 발전의 력사를 알리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그 말씀이 가슴에 와닿네요, 그렇다면 향후의 창작성향과 계획은 어떻하신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구태여 말씀드리면 저의 다음 장편소설은 “백년극장”이라는 소설입니다. 또 한부의 력사소재로서 100년전에 이주민들이 운집한 현성에 지어 세운 극장을 배경으로 한 백년의 이야기입니다. 그 극장주변에서 3대가 뒤얽혀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속에 지울 수 없는 애증 관계를 그려낸 편폭이 긴 작품으로서 그가운데 우리 조선족이 겪어 온 굴곡과 애환을 한부의 흥행영화처럼 그려내려 합니다.  매체의 언론인과 소설가의 삶을 병행해 왔기에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저의 작품의 특색이라 말할수 있고 이것이 남보다 차별화되는 나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뢰할 만한 소설창작 기량을 발휘해 주제와 소재의 명징성, 소설적 사건의 이미지화와 깔끔한 흐름등이 잘 조합되여 있는 대서사적인 작품을 다루는 것이 나의 금후의 창작의 한방향이 될 것입니다.    문: 김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김: 감사합니다.                                    ----M----    문: 장편소설 은 정교한 필치와 탄탄한 캐릭터, 생생한 리얼리티, 그리고 강렬한 스토리로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만행을 낱낱히 폭로했습니다. 작가는 또 넘치는 에너지로 잔혹한 리얼리티속에 숨겨진 숨막히는 서사를 긴 호흡으로 끌고 나가면서 아름다운 꽃들이 피기도 전에 어떤 무자비한 인성에 의해 유린당하고 처참히 사라졌는지를 밝혀놓고 세상을 향해 커다란 호소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작품이 갖는 문학사적의의도 여기 있지 않나 하고 생각됩니다.  민족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방대한 작품량으로 묵직한 소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 있는 김혁 작가님, 작가님의 다음의 또 한부의 력작이 기대됩니다.   네, 오늘 프로 여기서 줄입니다.  이 시간 프로기획에 최명광, 제작에 량영택, 원미란, 비디오 촬영에 김호룡이였습니다.    -end-  
419    소설가 김혁 중앙민족대학서 특강 댓글:  조회:719  추천:15  2019-04-28
소설가 김혁 중앙민족대학서 특강   소설가 김혁 23일,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부의 요청에 의해 소설가 김혁이 를 테마로 특강을 펼쳤다. 중앙민족대학 조선문학부 교수와 학부생 및 석, 박사 연구생 40여명이 참가했다.   김혁은 조선족 문학연구와 문학습작에 도움을 주는 데 목적을 두고 조선족문학의 형성으로부터 시작해 외래문학의 영향, 우리 문단 진맥 등 약 1시간 30분에 걸쳐 강의했다. 김혁은 강의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그 력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자신의 독특한 지정학적, 문화적 특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학의 우수한 전통도 고스란히 물려받아 반도와 세계 각국 겨레문학의 흐름중에서 아주 각별한 위치와 나름의 위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 또 조선문학, 일본문학, 로씨야문학, 한국문학이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고 조선족문학과 해외문학의 수용의 차이를 설명했다. 우리 문단 진맥에 있어서는 퓨전시대 새로운 쟝르가 출현하고 있지만 우리 문단은 문체시도가 따분하고 쟝르실험이 전무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많은 이야기와 민족특색을 간직한 우리 민족 문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2019-04-27     
418    뿌리 깊은 화두와 뜨거운 육성의 만남 댓글:  조회:801  추천:3  2019-04-01
  뿌리 깊은 화두와 뜨거운 육성의 만남 -“춘자의 남경” 애독자, 애청자 간담회에서   존경하는 라디오 방송국의 지도자 여러분, 문학계 선배님들 동인 여러분, 방송인 여러분 그리고 애독자, 시청자 여러분… 저는 오늘 다함없는 감개로 저의 또 한번의 출간 기념회나 진배없는 라디오 소설 “춘자의 남경” 종방 기념의 자리에 섰습니다.   무려 56회, 아나운서들의 생생한 육성에, 비장한 음악, 생동한 효과음과 혼효(混淆)되여 나온 라디오 소설 “춘자의 남경”은 저 작자 자신도 매료될만큼 농도와 줄기가 다른 문학의 향연이였습니다. 석달간 수고를 바친 제작진에 감사와 축하를 보내며 이 자리를 빌어 함께 작품의 창작의취와 창작 과정을 다시 한번 더듬어 보려합니다.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자신의 금후의 모든 창작성향이다”고 저는 어느 인터뷰에서 천명한적 있습니다. “소설의 본령이 곧 '허구적 사실성'의 설득력을 주요한 미덕으로 삼는 것인데” 매체기자와 소설가로서의 병행된 삶을 수십년간 이어 왔기에 그 와중에 더듬어낸 이 것이 바로 남보다 차별화되는 저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의취로 저는 력사의 대사건 속에 부침하는 소인물들의 나름의 서사를 보여준 장편물들을 꾸준히 창작해 왔습니다. 저의 7부의 장편소설중에서 5부가 바로 력사소재에 편중한 창작물입니다.  문화대혁명의 란장을 보여준 “마마꽃, 응달에 피다”, 일제강점기 연변이 낳은 민족의 시성 윤동주의 문학적 삶을 보여준 “시인”, 연길감옥에서 죽어 모아산 어딘가에 묻힌 중국의 마지막 황후 완용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보여준 “달의 몰락- 완용 황후전”이 바로 그 일례입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 바로 “춘자의 남경”이 있습니다.   몇해전cctv의 짤막한 일곱시 뉴스에서 힌트를 받고 나온 작품이 바로 “춘자의 남경”입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의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에서는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한명이 열흘 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수십년 전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습니다. 수십만이 넘는 중국과 조선 그리고 동남아 나라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습니다. 뉴스를 접하던 그날 나는 이미 반나마 써내려간 다른 한 장편을 접고 “춘자의 남경”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위안부라는 “뜨거운 감자”격의 이슈로 이 책이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품은 단지 위안부를 위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소설의 서두에는 경신년 연변땅에서 일제가 자행한 “노루골 참안”이 나옵니다. 일제는 당시 민가와 학교와 교회를 깡그리 불사르고 남정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성차지않아 녀인네들이 눈물로 묻은 시체를 다시 파내여 소각하는 귀축같은 “이중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는 저 유명한 “남경대학살”의 현장이 잠간이나마 무겁고 핍진한 필치로 나옵니다. 이제 나라적으로 “국가 공제일”로 제정된 대학살사건입니다.  나의 고향과 남경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대사건을 얼개로 하고 위안부를 증언자로 그 아비규환의 중심에 세워 우리 문단, 중국문단 나아가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소재인 전쟁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평화를 부르려는 그런 중후한 작품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춘자의 남경”은 2015년 “연변문학”지에 일년간 련재되였고 2018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습니다. 그동안 독자여러분의 꾸준한 사랑속에 작품은 또 번역가 근욱선생의  심혈을 쏟은 번역으로 중국작가협회의 번역지지작품으로 선정되였고 작가출판사에 의해 올해초에 중문으로 출판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라디오 소설로 제작되여 공중파를 타기에 이르렀습니다.       최근들어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 통신망의 확산은 문학과 그 수용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의 위기설에 대한 신음도 한두 해의 일이 아닙니다. 방송도 동병상련으로 그 아픔을 겪어왔습니다. 새로운 전파매체에 쉽게 적응한 분야만이 대중의 호응과 갈채 속에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라디오에 이어 텔레비죤이, 텔레비죤에 이어 케이블 텔레비죤과 위성방송이, 위성방송에 이어 이제는 인터넷, 위챗… 이렇듯 전자기술의 발달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래일 잠에서 깨면 또 어떤 매체가 득달같이 선보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문학이 이제 더는 방송과 영 어울릴 수 없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관계일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는 또한 매체의 공존시대이기도 합니다. 수용자에게 문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그 전달의 종류와 방식이 다양하여 하나뿐 아니라 여러 가지 매체에 대한 수용과 선택도 다양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두툼한 책보다 덜 부담스럽고, 다루기가 경외(敬畏)스러운 인터넷보다 더 친근한 라디오는 내밀한 문학적 소통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약간 오래 된 느낌, 느릿하지만 오래 곱씹을 수 있는 새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오로지 종이매체에만 기대였던 문학이 21세기를 사는 디지털 세대와의 소통이 이루어지기전 라디오라는 또 하나의 오래 된 매체가 있었습니다.    비록 요즘들어 어려운 파장을 겪고 있지만 어제의 소리를 들려주고 지금 현재의 소리를 기록하는게 방송이 가지는 끊을 수 없는 매력과 최고의 지향점이 아닐가요. 흥감스러움일지 모르지만 라디오 소설 “춘자의 남경”이 바로 그러한 활용과 실천의 본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유장한 소리의 음파가 더 높은 파장으로 더 멀리 더 오래 울려가리라 확신을 가져봅니다.   여러번 천명한 바이지만 민족작가의 소명의식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고 민족의 력사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그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면성과 립체성을 규명하는” 제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자 합니다.   다함없는 순발력과 예술적 끼를 보여준 성우들과 다음 또 손잡을 기회가 있기를 바래 봅니다. 중후한 메세지, 뜨거운 육성으로 침체된 문단을 들깨우고, 독자들과 눈과 귀를 함께 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3월 30일    
417    「蓝眼睛的溺死者」 댓글:  조회:859  추천:20  2019-03-29
  「蓝眼睛的溺死者」 - 致弗吉尼亚.伍尔夫   金革     注: 1941年的今天是,英国女作家弗吉尼亚.伍尔夫投河自尽,离开这个世界的日子。   伍尔夫, 蓝眼睛的弗吉尼亚.伍尔夫 像风中蓝色的风铃草般 坐在河岸出神或发呆   被风扯动的金发 像纷乱的挽幛 孤独而悲伤   伍尔夫, 蓝眼睛的弗吉尼亚.伍尔夫 收住笑靥窥视着 浓绿的水  蜉蝣的水草 灌木丛的倒影   失去蓝调的目光里 包裹着被抑郁虫噬咬的灵魂   没有《一间自己的房间》 没有《海浪》 没有《灯塔》    伍尔夫, 蓝眼睛的弗吉尼亚.伍尔夫 幼年被强奸 中年沉迷于自杀 在优雅和疯癫之间挣扎   抑郁像重甸甸的石子 压在她的躯体里 沉淀在她的脑海里 像意思流的脚步声,清晰、刻骨   隐秘的记忆 敏感的笔尖 反复描述着天堂与地狱的河床 一面澄明,一面黑暗 一面是创造,一面是毁灭   所谓 学院及文学相关的文稿与学者 所谓 信仰与理性 在灰色的眼眸里已凌乱无序   抑郁强买强卖 文人也无一幸免 抑郁与抑郁的对决中 伍尔夫迷失了 迷失中蓝眼睛目睹了 众神死亡的河岸 有野花香还有河的气息的 那所彼岸   沼泽一直在 黑暗一直在 抑郁一直在   伍尔夫, 蓝眼睛的弗吉尼亚.伍尔夫 把死亡当做一个拥抱 亲吻花园书房前涌动的河水 试想在水里磨砺她柔软的命运    爱抚河面的春风 已收不拢抑郁的黑衣 于是伍尔夫, 蓝眼睛的弗吉尼亚.伍尔夫 怀抱着硬硬的石头,走进柔柔的水里   有人问过 “为什么一定有人要死?" “为了对比 ”  “那么谁会死?" “作家”  蓝眼睛的弗吉尼亚.伍尔夫说  “那些心怀梦想的人” ... ... ... ...   2018-03-28        * 弗吉尼亚•伍尔夫(1882—1941) 英国女作家,意识流文学代表人物,伦敦文学界的核心人物。被誉为"二十世纪现代主义与女性主义的先锋"。 《达洛维夫人》 《去灯塔》,《一间自己的房间》等作品都是其名作。 1941年3月28日,伍尔夫口袋里装满了石头,投入了她家附近的欧塞河自尽。     보통 버지니아 울프라고 하면 예민하고 우울한 얼굴의 여류 작가, 헌신적인 남편을 저버리고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 작가를 떠올린다.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로 독창적인 소설 형식에 공헌했으며, 당대의 가장 뛰여난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이였다.  대표작으로는 "등대", "자기만의 방", "올랜도"가 있다.    
416    「哈尔滨火车站」 댓글:  조회:691  추천:15  2019-03-26
  .诗歌. 「哈尔滨火车站」 金革    在人头攒动,摩肩接踵的 冰城的火车站 我站成了一副静态 举起了 像枪枝的自拍杆 对准了背个包悠然的我 卡擦! 自恋了一张   远处高耸的圣.索菲亚教堂 响起了空旷的钟声 惊起了一片片白鸽飞 不由得让我想起了 伫立成一副动态 为和平,为民族而举枪的 留八字须的高丽亚硬汉......   2018-3-20    
415    金革长篇小说“春子的南京” 出版发行。 댓글:  조회:734  추천:13  2019-03-13
中国作家协会会员,朝鲜族小说家金革的长篇小说“春子的南京” 汉文版近日由作家出版社出版发行。 中国作家协会会员,延边大学翻译硕士导师靳煜翻译。 ​ “春子的南京”,通过刻画慰安妇群体的悲惨命运,回顾那段不堪回首的历史,进而呼吁反战与和平。 为了让更多的人了解历史真想,金革小说家本着对历史和后代负责的态度,在大量调查史料,实地踏查战争遗址的基础上,以艺术的手法,还原了那段历史,塑造了以春子为代表的慰安妇群像。 通过春子等慰安妇们崎岖坎坷的命运 ,深刻地揭露了日本侵略战争肮脏、丑恶、丧尽人性的罪恶本质,表达了全人类有良知的人们反对战争、珍爱和平的良好愿望。 ​ 作者金革近年来著作甚丰,已发表,出版了长篇小说“猩红热”、“局子街的女人,”,“诗人”,“无声时代”、“傀儡皇后”、小说集“扼杀天才”,长篇纪实文学”天国无梦“,“韩乐然传”等。 ​ “春子的南京”于2016年入选中国作协少数民族文学民译汉扶持作品。 ​ 记者 杨守玉 ​ “延边日报” 2019 年3月 13日       ​
414    「书生怀中猫」 댓글:  조회:766  추천:9  2019-03-13
「书生怀中猫」   金革 猫,像来自远处的高僧 它白衣如雪 神态空灵 它的目光,像一盏灯 它背上的纹,像一袭袈裟 它的毛色,像白昼与黑夜 和世间达成和谐。   它目光如梦,捻指微笑 以我的书斋为场 打坐,打盹。 而我被挤在一旁 将就做一首小诗。   我像 一个从李朝五百年出走, 要进京赶考的书生 背着箱笼上路 背着团饭,谷酒和诗集,还有猫。   猫, 它能给我一记超度的时光吗?   2017-12-4 【听雨斋】里的爱猫- ‘淘郎君’ 나의 서재 "청우재"와 애묘 '토랑이'
413    다매체시대와 우리 작가들의 예술적 탐구 댓글:  조회:684  추천:13  2019-03-03
    평론   다매체시대와 우리 작가들의 예술적 탐구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우리는 농업사회,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를 거쳐 인공지능기술의 시대로 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경우는 정보화사회, 즉 다매체시대에서 창작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모임의 테마는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1928—2016)는 1980년에 《제3의 물결》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내놓았는데, 인류는 농업혁명에 의한 제1의 물결, 산업혁명에 의한 제2의 물결이라는 대변혁을 경험했고 앞으로 20~30년 사이에 제3의 물결에 의한 새로운 변혁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21세기는 디지털혁명의 시대라고 하면서 디지털혁명도 혁명인 이상 적잖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늘의 세계상을 보면 그의 예언이 적중한 것 같다. 보통 20세기의 4대 발명으로 핵기술, 통신기술, 항공기술, 유전자기술을 들고 있다만, 그 중 "제3의 물결"을 선도해온 통신기술이 우리 인류에게 전례 없는 문화적 혜택을 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혹간 스마트폰을 집이나 직장에 두고 나왔을 때에는 누구나 다 숲속에 간을 두고 온 토끼처럼 불안해진다.    아무튼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한 인터넷과 위챗은 다매체시대의 중요한 표지로 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커다란 편리를 주고 있다.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스마트폰 하나로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다.   우리 작가들 중에도 석화 시인이나 정세봉, 김혁과 같은 소설가는 문학카페를 만들어가지고 자기의 작품은 물론 우리 문단의 동태나 최신작들을 속속 소개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은 알리페이(Alipay, 支付宝)같은 것은 이용할 줄 몰라 빈축을 사기도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검색하거나 여러 가지 사전을 손쉽게 이용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011년 "9.11테러" 때 핸드폰을 통해 아내를 구출한 프랑스 기자의 이야기가 좋은 예로 된다고 하겠다. 그날 프랑스 빠리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뉴욕의 세계무역청사가 육탄공격을 받는 장면을 보고 그 빌딩에서 사무를 보는 아내에게 스마트폰으로 알려 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매체시대 역시 빛과 그늘을 갖고 있다. 다매체시대 우리 작가들이 직면한 곤혹과 위기를 적어도 아래와 두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각일각 홍수처럼 쏟아지는 매체의 방대한 정보량에 현혹되어 다만 그 가상의 세계에서 소재를 취하는 경향이다. 물론 다양한 매체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도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작가들이 자신의 개체적인 관찰과 체험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가상적인 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고 여러 매체의 뉴스, 이러한 뉴스에서 전달하는 특이한 인물과 사건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작가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다양한 매체들에서 이미 모든 소재를 제공했다. 작가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와 이야기,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이미 만들어졌으니 새로운 조합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작가의 개체적인 관찰과 체험에 의한 창조를 포기하고 최종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론에서 주장하는 페스티시(pastiche)를 만들어내게 된다. 패스티시는 다른 텍스트에 대한 모방으로서, 그것은 기성 작품의 내용이나 문체를 교묘하게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과장이나 풍자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패러디(parody)와는 달리 긍정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특성을 지니며 여러 작가의 여러 텍스트로부터의 부분적인 모방들을 가져다 자기 작품에 합성시켜 놓습니다. 이런 행위는 창조성을 생명으로 간주하는 작가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활자매체와 언어예술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의 상실이다. 근대의 지배적인 매체인 활자매체와 결합된 문학은 그 결합으로 근대의 문화적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매체시대에 와서 활자매체는 종래의 지배적인 위치에서 거침없이 추락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가능해진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매체들은 활자매체를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에 따라 문학은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다른 매체나 장르의 곁방살이나 시녀의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들은 동화상(動畫像)이나 음향과 같은 예술에 도무지 미칠 수 없는 문학의 묘사나 표현력을 절감하고 기가 죽게 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문자와 동화상, 음향이 한데로 겹쳐지는 하이퍼텍스트( hypertext, 컴퓨터에서, 문자, 그래픽, 음성 및 영상을 서로 연결시켜 비순차적인 검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텍스트)의 형태로 옮겨가고자 한다. 최근에 나온 《중국조선족시화선집》이나 저의 제자 박아무개의 시집이 그러하다.  하지만 언어예술, 즉 문학의 생명력과 존재의미가 소진되고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언어예술은 모든 예술형태의 기초로 되며 다른 예술형태에 비해 사회생활을 보다 폭넓게, 깊이 있게 묘사할 수 있다. 작가는 어쨌든 언어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언어가 주는 보다 큰 상상력과 그 여백, 심리묘사의 깊이, 비유와 은유, 상징과 아이러니, 패러독스와 패러디의 매력을 알고 그것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요즘 저는 한국 작가 김훈(金薰, 1948~ )의 《칼의 노래》를 읽고 언어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두고, 귀신도 울게 하는 그의 탁월한 문장력을 두고 전율할 정도로 놀랐다.   우리 문단의 경우, 나는 다매체시대 문학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우수한 작품을 속속 펴내고 있는 사례를 허련순과 김혁 두 소설가의 작품을 통해 보고자 한다. 물론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와 프랑스 작가 메리메(Prosper Mérimée, 1803 - 1870)의 작품과의 상호텍스트성에 관해서는 김관웅 교수가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는 허련순의 단편 《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와 김혁의 단편 《www.아픔.com》에 대해 잠간 살펴보기로 하겠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폭넓은 독서를 통해 고금중외의 명작을 체화(体化)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互文性)의 원리를 두 작가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작품은 없다는 말과 같이 작가들은 선행 텍스트를 차용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으며 독자 역시 텍스트를 읽을 때 다른 텍스트를 참조할 수 있다. 또한 작가들은 의식적으로 선행 텍스트를 참고할 때도 있고 이미 선행 텍스트를 체화했기에 저도 모르게 선행 텍스트를 차용하거나 변형시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성격패턴이나 인물관계, 모티프나 플롯을 교묘하게 차용해서 오늘의 생활을 담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쉽게 말하자면 약탕은 바꾸고 약은 바꾸지 않는 게 아니라 약탕은 바꾸지 않되 약은 바꾸는 수법을 구사한다. 허련순의 《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는 한국의 어느 평론집의 제목을 빌려 쓰고 있고 소도구, 인물관계와 플롯은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를 묘하게 닮았습니다. 두 작품은 모두 귀중품인 금목걸이나 다이야반지를 손에 넣었다기 맹랑하게 잃어버리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성격, 그리고 주제는 다릅니다. 모파상의 《목걸이》는 서민층의 허영심을 비판한 작품이라면 허련순의 《푸줏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는 물질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일부 조선족형제들의 탐욕과 그로 인한 비도덕성을 꼬집은 작품이라 하겠다.    김혁의 단편 《“피에 누아르”의 춤》에서도 역시 모파상의 단편 《나의 삼촌 쥴》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만, 이 글의 주제를 진일보 논증하기 위해서는 한국작가 하근찬의 《수난이대》의 인물관계와 서사구조를 따다가 코리안 드림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은 조선족사회, 그 재활의 몸부림을 리얼하게 형상화한 김혁의 단편 《www. 아픔. com》을 례로 들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하근찬의 《수난이대》는 일제시대와 “6.25”전쟁의 아픔을 초극하고자 하는 서민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수난의 초극이라는 주제를 한 팔을 잃은 아버지와 한 다리를 잃은 아들의 해후를 통해 해학적인 필치로 다룬 명작이라 할 수 있다.    김혁의 작품에 와서는 한 다리를 잃은 아버지가 한 다리가 불편한 안마방 마담으로 나오고 한 팔을 잃은 아들 역시 한 팔을 잃은 남주인공으로 변신한다. 둘 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크게 다쳐서 불구가 된 몸이다. 둘은 안마방에서 우연히 만났고 서로의 동병상련에서 몸을 섞는 사이까지 된다. 하근찬의 소설에서는 한 팔은 잃었지만 다리가 성한 애비가 한 다리를 잃은 아들을 엎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압권이라면 김혁의 소설에서는 깊은 밤 한 다리가 불편한 아낙과 팔 하나가 없는 남정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백미라 하겠다. 불행한 남주인공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이다.    녀자가 깁스를 한 행복의 손을 들어 가슴에 얹어주었다. 어줍게 가슴을 만졌다. 건과(乾果)같은 녀자의 유두가 손에 들어왔다.  본능에 넘쳐 그 가슴을 와락 옴켜잡았다. 그러다 팔에 통증을 느끼며 나지막이 신음을 뿜었다.  녀자가 옷을 벗었고 의족도 벗었다. 행복은 짚이영에 튕긴 불씨를 치우듯 후딱 탁상등을 꺼버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두 사람은 안타깝게 허둥거렸다.  어둠에 익숙하지 못해서가 아니였다.  한 사람은 오른 팔, 한 사람은 왼 다리,  상처입어 갈가리 해체된 몸뚱이를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몰라 헤맸다.  두 사람은 지접(止接)이 잘못된 괴상한 과수의 가지처럼 왜곡된 형상으로 한데 얽혔다.  그리고는 부서진 뼈가 잇기 듯, 찢겨진 피부가 아물어 붙듯 서로에게 들붙었다. 오늘만 있고 래일이 없는 곤충처럼, 단말마로 서로를 탐했다.  등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로 얼룩진 녀자의 얼굴이 척척했다. 그 척척한 얼굴에 자기 얼굴을 붙여 대였다. 다른 하나의 눈물이 마르려는 그 눈물자국 우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얽혔다.  서로는 서로의 눈물을 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녀자는 간호사 여러 명이 달라붙어 분쇄성골절을 입은 팔에 딱딱한 석고를 마구 댈 때처럼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처절한 장면의 설정과 절묘한 비유들, 시와 같은 짧은 호흡의 문장들, 코리안 드림의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서민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준 수작이라 하겠다. 1937년 독일 콘도르 비행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만신창이 된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의 참상을 그린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 《게르니카》를 방불케 하지 않는가! 요컨대 다매체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 빛을 충분히 이용할 때, 개체적인 체험을 토대로 하면서도 다매체를 통해 공금중외의 명작을 널리 읽고 여러 장르를 아우르면서 언어예술의 장점을 십분 살릴 때 우리 문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매체시대를 살아가는 비법은 다른 장르들을 기웃거리거나 멜로드라마나, 무협지, 추리소설과 같이 똑같은 인물과 줄거리를 조금씩 변용하여 이야기를 엮는 작품을 창작해 여러 매체를 선점하는 게 아니라 독창적인 개성과 인류보편성을 결합시킨 작품, 조선족사회는 물론 한국이나 중국 주류사회에서도 읽힐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길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문학의 거목 김학철 선생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소설은 약이 아니므로 억지로 먹일 수 없다고 했고 문학의 기본적인 바탕은 언어이므로 이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이에 대한 수양을 쌓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베실로 수를 놓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변문학” 2019년 제2기      
412    신(新) 매체시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테제 댓글:  조회:1090  추천:29  2019-02-28
  . 칼럼 .   신(新) 매체시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테제 - ‘다매체시대 소설문학의 출구는?’문학세미나에서 한 발언 김 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90년대 말 경, 해외 모 문학지에서 “래년부터 우리는 원고지가 아닌 이메일 투고를 전격 실시합니다.”라는 작품공모를 보고 적이 놀란적이 있었다. “천일야화”같은 이야기인줄로 알았는데 불과 2년도 안되여 우리 문단에서도 컴퓨터 창작과 편집이 본격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만년필을 던지고. 컴퓨터로 타자하여 문학지에 실린 첫 작품이 2000년 순수문학지 “도라지” 톱에 실린 중편소설 “라이프 스페이스”(生活空间)인줄을 난 경희와 함께 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문단에서 그 누구보다 앞서 문학, 뉴스, 력사로 분류하여 무려 다섯개의 블로그를 쟝르 별 만들어서는 거의 20년간 꾸려왔다.   그러나 이제 위챗이 우리의 일상의 공간에. 문학공간에 비집고 들기 시작했다.  “촉새 황새 따르기”로 뒤미처 스마트폰에 문학 위챗계정을 만들었다. 문학 블로그와 더불어 나의 신작들을 실시간 올리면서 독자들과 새롭게 만나고 있다.  나의 위챗계정의 이름은 고향 룡정에 있는 오프라인의 나의 서재의 이름과도 꼭 같은 “청우재(听雨斋)”, 그 키워드를 문학, 력사, 영화, 음악, 동물 등등으로 정하고 매일이고 게시물들을 나름 선정해 올리고 있다. 작은 핸드폰 속에 세상만사, 천태만사, 사방오방을 다 담으면서 구지욕에 넘쳐 “작은 두레박에 우물 통째를 담으려”하고 있다.  문단 처음으로 위챗계정에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련재했다. 십여년 전에 출간되였던 나의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수상의 특혜로 나온 책이라 겨우 200권밖에 출간되지 못했는데 위챗련재를 하면서부터는 일 조회수가 거의 천명에로 치달아 올랐다. 게다가 댓글 기능까지 있어 독자들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가능했다.  문학을 담는 그릇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또 변할 수 밖에 없다. 죽간(竹简)이나 양피지(羊皮纸)를 사용하던 시대에는 값싼 종이 책에 외려 령혼이 없다고 보았다. 그처럼 모바일 기기를 문학의 “적”으로 생각하는 부정적,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모바일 기기를 활용한 새로운 방식을 문학의 상실이라고 보면 더구나 안된다.     눈부신 통신수단의 발달과 미디어 외연의 확장과 더불어 문화와 예술의 패러다임은 바뀌고 있다. 전통 매체의 권위성과 독선이 희석화 되고 문학단체와 작가, 독자 등이 직접 미디어를 운영하고 작가, 독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들어섰다. 따라서 탈이데올로기, 문학과 예술의 대중화, 디지털화 등으로 바뀌여지는 오늘날의 문화풍토에서 전통문학의 책무가 더욱 절실하게 되였다.    이제 우리 문단도 주류문단과의 접목, 세계화로의 출두를 위해 다양하고 선진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세계 각지의 독자들에게 보다 손쉽게 조선족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블로그, 위챗계정에서 독자들과 만나는 전자작품은 시효성, 접근성, 범용성 등에서 큰 장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박봉을 털어 자비로 낸 종이책을 지인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고 보면, 시장류통이라는 환절이 탈락되고 책이 더욱 많은 독자군체와 대면할 수 없어 소통이 단절되였던 문단풍토에서 벗어나 문학이 새롭게 독자들과의 만남과 호성을 불러내는 기꺼운 변화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인터넷, 위챗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의 발랄한 운용은 아직도 오지, 변두리 문학에 머물러 있는 우리 문학의 광범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전통문학과 새로운 미디어의 종속관계에 신경을 도사릴 것이 아니라, 응당 쌍방향적이고 복합적인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변혁기의 필수적 변화는 형식의 쇄신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함으로 새로운 창작방식, 새로운 소재, 새로운 문체를 지니고 새로운 류통전략으로 새로워진 독자들의 미뢰(味蕾)와 만나야 한다.   지난세기 90년대로부터 문학의 영향력이 급격히 격하되고 문학 령역이 축소되였다. 우리말 문학지가 7만부의 발행수치를 기록하고 혼인구애광고 뒤에 “문학을 애호함”이라고 기어이 적던 그 풍토는 이미 툽상스러운 6권 사전 같은 두툼한 향수 속에 갈무리되고 말았다.  작가와 독자들이 문학의 정체성 문제에 직면하고, 모든 것이 미디어로 환원되고 있는 변혁기의 오늘날, 작가는 이 모든 혼란에 미상불 대응해야 한다. 문학의 위기를 목메여 부르짖는 대신, 득달 같이 다가 온 기계혁명에 적극 부응할 때 그 것은 위상이 바닥에 내쳐진 우리의 문학을 새롭게 촉발시키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만이 갖고 있는 문화의 토속적인 정서와 력사의 중후한 무늬를 세상에 알리고자 오늘도 컴앞에서, 혹은 스마트폰을 들고 불면의 밤을 새우는 작가와 독자들이 미디어의 미래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가 소망해 본다.      “연변일보” 2018년 9월 7일    
411    朝鲜族“60后”作家的倾情书写 댓글:  조회:1572  추천:10  2019-02-28
  朝鲜族“60后”作家的倾情书写   郑风淑      一   改革开放以来,朝鲜族作家以“50后”、“60后”作家为中流砥柱,携手“30后”、“40后”、“70后”、“80后”作家,以饱含深情的创作,书写在党的民族政策光辉照耀下的延边各族人民,以及生活在全国各地的朝鲜族、海外务工的朝鲜族人的多彩生活、命运浮沉,掀起了朝鲜族文学的持续繁荣。 在这个过程中,金哲、林元春、朴善锡、南永前、金应俊等“30后”、“40后”作家继续坚持创作。他们的辛勤劳动对朝鲜族文学发展作出了不可磨灭的贡献。崔红一、许连顺、金勋、禹光勋、尹林浩、李惠善等“50后”作家佳作纷呈。金勋的小说集《京城里的“乡巴佬”》(2001年)、石华的诗集《延边》(2006年)、李惠善的长篇小说《生命》(2006年)、崔红一的长篇小说三部曲《龙井别曲》(2013-2015年)、许连顺的长篇小说《中国媳妇》(2015年)和《谁曾见过蝴蝶的家》(2015年)等,是其中较具影响力的代表作品。   作为承前启后、继往开来的朝鲜族“60后”作家,顾名思义就是指1960年代出生,文学起步大多始于1980年代中后期的作家。“60后”一代经历了复杂多变的历史时期,他们的视野相对宽广,精神、思维具备较好的均衡感。他们的文学是与中国改革开放至今活力四射的巨变时代同呼吸、共命运的文学。他们在20多岁最敏感的时候迎来改革开放时代,三十而立时被卷入市场经济大潮之中,该四十不惑了却迎来信息化时代,如今五十知天命了,正冷静地观察这个时代,然后继续创作新的作品。 需要特别指出的是,他们曾经经历过上世纪80年代后期到90年代前期中国社会市场化起步的大躁动,受市场经济的吸引,一些作家曾经弃文从商,但仍有很多人留在文学领域继续奋战。经过大浪淘沙,留下来的都是那些忠于文学、立志为文学献身的写作者。新世纪之后,随着散文体裁的大兴起,又有一批以散文创作为主的“60后”作家出现,其中也不乏那些大器晚成的优秀作家,主要是在八九十年代沉浮中坚守朝鲜族文学阵地的那些精英,或称狂热的文学信徒。   二   崔国哲是中国朝鲜族“60后”作家的代表之一,出生在南大村。他的童年和青年生活都是在乡村度过的。在凉水镇的南大村,他专心致志写作品,孜孜不倦地垒起了一座文字之塔。1987年,崔国哲25岁,在《天池》刊物上发表了处女作《乡村之光》,展露了一个小说家的才华。   崔国哲   “笋有多大,竹有多粗。钻出地面竹笋的粗细,决定竹子一生的粗细。无论成长十年也好,二十年也罢,竹子虽然会长高,会变得坚实,但它的粗细依然如初,是刚刚钻出地面时的竹笋的粗细,一成不变”。这是崔国哲小说《春天的葬礼》的词句。后来,他以这部作品获得了《天池》文学奖、金达莱文学奖等4项文学奖,他的创作才能进一步为人们所认识。 对于民族之根的不懈探索和对朝鲜族社会现实的不断反思,以及对于朝鲜族生活现状的细致描绘,是崔国哲的小说所体现的主要内容和特色。因此,他的小说始终具有浓郁的民族色彩和乡土气息。《光复的后裔们》(2010年)是崔国哲创作的第二部长篇小说。作品以朝鲜族小村庄“南大川”为背景,详细描绘了“光复”前后发生的巨大变化及生活在这种历史条件下的人们的不同命运。作品可贵之处在于极为生动地再现了朝鲜族人民面对历史大变革,时代如何改变了个人命运的真实面貌。该作品所描写的故事,正是中国朝鲜族史册中最真实的片段之一。 经过多年的辛勤努力,崔国哲创作了长篇小说3部,中短篇小说800余篇,散文100余篇,获得了各种文学奖20多次。     金革   金革是朝鲜族“60后”作家的又一个代表,是朝鲜族文学界少见的多产作家。 金革对阅读充满热爱,称他为“读书狂”都不为过。阅读为他的文学创作提供了很多养分。他的阅读不止局限于文学,而且还涉猎哲学、艺术、历史、宗教、天文学、生物、民俗等领域,包罗万象。他购置、收藏了大量图书,其书房有15000多册的书籍和6000多份影像资料。此外,他还常年订阅了十多种期刊。   1985年,金革发表短篇小说《侏儒们》,由此步入人们的视野,随后又陆续发表了《诺亚方舟》(1985年)、《品酒》(1985年)等。从此,他的短篇小说创作一发不可收拾。1994年,金革发表中篇小说《迷茫的城市》《笛子》《银妆刀》等,后来又创作了一系列具有超现实主义色彩的中篇小说,如《天才》(1995年)、《人鱼的小提琴》(1996年)、《坠落的翅膀》(1998年)、《病毒》(2000年)、《祖母的传说》(2003年)、《火祭》(2005年)、《原罪》(2006年)、《热铁皮屋上的猫》(2008年)、《木马与淑女》(2009年)等。还发表,出版6部长篇小说。   朴长吉   文学反映现实生活,文学创作离不开所处的时代,特别是诗歌,其灵感源泉与时代社会的变化密不可分。朴长吉是朝鲜族具有代表性的“60后”诗人之一。   他正好于1960年出生,其诗歌创作从1980年代起一直持续不断。迄今为止,他已出版《石磨》(2003年)、《短诗长叹》(2010年)、《抵达名为你的站点》(2016年)等多部诗集。这些诗集留有时代的痕迹。比如,《石磨》凸显上世纪八九十年代的创作特征,而《短诗长叹》《抵达名为你的站点》则带有新世纪以来的多元文化思潮。   三   从文学发展的规律来看,每个时期的文学思潮或文学观念都要由其相应时代的代表作家群来实现、来完成,无论是前代人还是后代人都无法替代。“60后”作家与“30后”、“40后”和“50后”作家有着不同的时代使命,他们必须更好地书写自己所生活的时代。 “60后”作家们关注的问题多种多样,比如民族历史轨迹与身份认同主题(如崔国哲的小说、金昌永的诗歌等),又如个人的不幸与上世纪六七十年代时代动荡的关系(如金革的小说),还有知识分子的懦弱与自尊(如韩永男的小说)等。工业化与城市化所带来的价值观的突变与人生本质的异化也是这一代作家聚焦的重要主题。   从创作风格上看,朝鲜族“60后”作家们大多个性鲜明,勇于创新,勇于开拓,经常涉猎多种文学体裁领域。韩永男和赵光明都是打破文学体裁边界的作家,是不甘寂寞的创新者。赵光明以小说创作起步,后来兼顾诗歌创作,最近几年又涉猎散文创作,在各个体裁领域都有所建树。韩永男早期以诗歌创作为主,新世纪之后,在坚持诗歌创作之外,还创作发表了大量的小说,出版了小说集《小岛,岛边,边缘人》,还曾涉足散文、报告文学和评论的写作。金革在小说写作中试验各种手法、技巧,同时涉足传记、散文等其他体裁的创作。   朝鲜族“60后”作家在各自不同的领域拓展着。特别是进入新世纪之后,他们的力量逐渐增强,群体规模也不断壮大。除了金昌永、朴玉男等“60后”优秀新生力量的先后补充外,随着新世纪前后的散文体裁大爆发,一大批优秀散文作家的加盟,进一步壮大了朝鲜族“60后”作家群。徐永彬、崔顺姬、金顺姬、南福实、杨银姬、姜贞淑、徐贞顺等都是颇具实力的散文作家,其中女作家居多。   总之,朝鲜族“60后”作家群勇于担负起社会和时代赋予的历史责任。他们无愧于时代,也无愧于历史,以个性鲜明的创作风格、包罗万象的主题意识和勇于探索的创作精神,写出一系列优秀作品。在当前的朝鲜族文学界,除了“60后”作家,还有从“30后”到“00后”的数代作家在一起努力创作着。正因为他们的持续努力,朝鲜族文学必将迎来持续繁荣的良好局面。   文艺报 | 2018年08月03日   朴长吉
410    장편인물전 "강경애 평전" 련재를 시작하며 댓글:  조회:2290  추천:16  2019-02-12
. 작가의 말 .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 장편인물평전 "소금꽃- 강경애 평전" 련재를 시작하며   김 혁     1,   소학시절, 학교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 길에 그후 문학비 하나가 외따로 솟았다. 바로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 이다. 룡정출신으로 10대로부터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 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의 첫 작품을 맨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 중기 초중학교 시절이였다. 방학이면 룡정 신화서점에서는 2층의 한 칸을 내여 아이들에게 책을 대여해 주었다. 땡전 5전을 내면 그 자리에서 책들을 열람할 수 있었다. 책의 홍수가 터진 요즘과는 달리 피폐하기 짝이 없던 문화풍토에서 아이들이 따로 접할 책이 없었다.  그래서 알뚱말뚱한 성인들의 책들을 도깨비 기와장 번지 듯 읽었다. 그렇게 책 대여점에서 열다섯 살 내기의 내가 생애 맨 처음으로 완독한 장편소설이 바로 강경애의《인간문제》였다. 일제 강점기의 농민과 로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핍진하게 그려내여 식민지 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그 소설을 어린 내가 다 알고 읽은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온통 도그마(Dogma)로 점철된 “도긴 개긴”격의 책 몇 권뿐이였던 그 시절, 소설 속 곰살가운 우리 언어와 선비, 첫째, 신철, 옥점의 형상은 내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99년에 강경애의 문학비가 비암산 자락에 세워지면서 다시 강경애의 작품들을 찾아 읽었고 지난 2005년에도 또 한번 이 불운의 녀작가와 만났다. 당시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뜨면서 학계에서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해외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 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회장을 필두로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이 진상 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추진회에서 운영하는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결국 강경애는 오명을 씻고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문화인물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 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히고 있었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선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고향에서 필밭을 경운했던 이 질박한 녀성작가에 대한 애대와 경모를 머금고 나는 강경애의 생몰일을 기념하여 여러 간행물에 강경애의 문학적 생애를  답사기, 칼럼등 여러 쟝르로 발표했다.  그리고  강경애 탄생 110주년을 맞으면서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를 휘동하여 그의 문학과 삶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기획, 주도해 펼쳤다. 조선족 소설가들과 문학도, 언론인들은 이날 룡정 비암산자락을 찾아  강경애문학비에 헌화하고 묵례를 드린 뒤 룡정시 도서관에서 강경애문학세미나를 열었고 내가 강경애의 생애와 작품을 조명하는 특강을 맡아 했다.   올해도 연변대학 조선문학연구소와 손잡고 학원생들을 상대로 “룡두레 우물가에 족적을 남긴 강경애”라는 제목의 특강을 다시 한번 하면서 대학가에 강경애를 알리기도 했다.      2,   강경애는 조선(한국)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걸출한 녀류작가인 동시에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도 추앙할만한 녀류작가로 정평되고 있다.   1906년 4월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부자의 딸로 태여났다.    1929년 10월《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염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을 읽고》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 그가 전공한 쟝르도 애초의 피상적인 서정시에서 특정한 정치적립장과 비평적 시각에 근거한 리론을 담은 평론과 소설로 바뀌였다. 한동안의 습작기간을 거쳐 강경애는 감상적인 문학소녀로부터 철저히 계급의식에 립각하여 글을 쓰는 작가로 변신하였다.   1931년에 강경애는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과 결혼하고 함께 북간도의 룡정으로 이주해 왔다. 1932년 1월 “신녀성”에수필《간도 풍경》을 발표했다. 두만강을 건너서 간도로 들어서는 감회를 피력한 글이다. 체험의 현장인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는 체험을 하게 되였다. 간도방랑체험으로 강경애는 1932년 9월《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을 발표한다.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은 투철한 반일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건실한 반일사상을 지니고 작품창작에 림 (臨)했으며 룡정에서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32년 일제는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우면서 《치안숙청》공작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 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고 또한 지병(持病)인 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8월과 10월의 “동광”지에 발표 된 수필《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 있거라》에 이때 간도를 떠나는 감회가 세세히 적혀 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와 안수길 등과 함께 조선인들의 문학단체인《북향》회동인이면서도 고문격으로 또 가정주부로 창작에 몰두했으며 1939년에는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중간에 간혹 서울이나 장연을 왕래하지만 주로 간도에 거주하면서 손수 물 긷고 빨래하며 한편으로는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귀병이 재발하여 다시 고향 장연으로 돌아가 1944년 4월 26일 영면하기까지 강경애는 10년간 룡정에서 세월을 보냈다.    강경애가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30년대는 일제의 파쑈적 탄압이 전에없이 기승부린 시기였다. 민족의식, 반일사상이 구현된 작품은 출판이 불허되였고 자그마한 요소도 수정이 강요되고 삭제당하였으며 신문련재가 중단되고 문예지, 종합지들이 결간, 페간되였다. 이런 렬악한 상황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개인의 안락을 찾아 민족을 등진 문인들, 매문가(卖文家)들도 나왔다. 그러나 강경애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시종 가난하고 천대받는 근로인민, 수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일개 가정주부로 더우기 신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진보적인 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릴수 있은 것은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룡정지역에서 살면서 시대에 대한 투철한 인식에 기초하여 글을 쓴데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그의 작품을 일람해보아도 그 뚜렷한 구현이 료연하게 알린다. 《신가정》에 《유무》는 1934년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을 묘사한 작품이다.  《신가정》에 발표한 《소금》은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의 참혹한 삶과 그에 저항하는 무장투쟁 부대를 묘사한 중편소설이다.  《녀성》지에 발표한 《어둠》은 제4차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사형 당한 항일혁명운동가의 가족의 고난과 과거 운동가의 전향을 그린 소설이다.  《동지》에 발표 된 《마약》은 아편중독자인 남편에 의해 첩으로 팔려 저항하다가 끝내 죽는 녀성의 수난을 그린 작품이다.  일본어로 쓴 소설《장산곶》은 황해도 몽금포의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인 로동자와 식민지 조선 로동자의 연대 문제를 반영한 작품이다.    강경애는 치렬한 문학생애에 21편의 소설, 2편의 장편연재소절, 24편의 수필과 7편의 시, 3편의 평문을 남긴것으로 알려진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소금》,《축구전》등 많은 작품들이 룡정에서의 간도체험과 갈라 놓을수 없기에 룡정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진 것이다.     3,   오늘날 조선족문학의 근저에는 김창걸, 윤동주, 리욱, 김학철 등과 더불어 당시 간도 지역에 족적을 남겼던 안수길, 최서해,강경애와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조선족 문학의 비조(鼻祖)로 되였고 이로써 우리 문학이 다원화적인 깊이를 이루게 될 수 있었다.   한 시대의 문학은 작가가 생존했던 동시대인들의 삶의 모습, 가치관과 시대의 소망을 담고 있다.  좋은 작품일수록 그 작품이 주어진 력사적 시대나 력사적 현실에 대한 반영에 얼마나 리얼했는가, 그리고 치렬했는가를 말해 준다. 작가만의 감성과 혜안으로 력사적인 현장에서 그 현실과 의미에 관여하면서 삶의 체험과 고뇌를 작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그것과 동화하고 일체가 되는 작업을 치렬하게 완수해 왔기에 그로서 생성된 문학적 가치가 강경애와 같은 이들을 명가로 그들의 작품을 명작으로 만든 것이다.   강경애의 작품이 요즘의 우리 문학에 시사하는바는 크다.   사회참여에 있어서 문학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있다. 따라서 당위의 문학으로 위세를 떨쳐온 리얼리즘도 이제는 낡투로 색바래졌다고 어떤이들은 말한다. 시장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부박한 그 지점에서 우리 문학은 자칫 그렇지 않아도 적은 독자까지 잃을수 있다. 상업주의 문학체제에 순응한다면 우리 문학의 이념은 결국 감각적인것이나 실험적인 론리에만 부박하게 꺼둘리고 말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 력사와 사회와 관련된 공동체 인간들의 삶을 다루는 그런 문학을 격려하고 가꾸어야 하며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선행되여야 한다고 본다. 여러 쟝르, 여러 문체의 작품을 통해 시대의 진실을 전파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에게는 강경애의 작품들이 중고로, 그가 몸으로 지향해왔던 것이 철이 지난 명제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과감하게 시장과 공리의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진솔한 언어로 오늘날 공동체의 깊숙한 아픔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성찰할 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문학이 아닐가!   어제날의 강경애가 바로 그러했다. 하기에 그는 주어진 소명을 하얗게 불태우며 작품의 행간에 민족과 시대를 위한 하얀 기념비를 오롯이 세울 수 있었다. 삶을 형상화하고 그 삶에 가치와 빛을 부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문학의 역할과 소명이라고 할 때 우리 현대녀성문학의 기초이며 높은 봉우리에 서있는 강경애의 문학을 우리는 다시 경모의 마음으로 접하게 된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나의 창작성향”이라고 밝힌적 있다. 이 모든 것은 수십 년간 기자라는 직종에 투신해왔기에 특정지을 수 있는 나의 남들과 차별화 된 창작성향이다. 지금도 나는 소설이라는 픽션물에 주로 매진하고있지만 칼럼, 기행문, 인물전이라는 논픽션물에도 몰입되여 있다.   다각적으로 조선족공동체의 력사와 현황의 면면을 보여주기 위한 소명의식으로 소설창작외에도 기행, 칼럼, 영화평 등 여러 장르를 충분히 동원하여 수년간 출간과 관련 련재를 이어가고 있다. 룡정의 백년사에 대해 전경식으로 조명한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푸른 솔, 해란강 깊은 물”과 문화력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인물계렬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등이 조선족의 백여년 력사를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근년래 나는 또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부와 비젼을 위한 작업— 조선족인물전 시리즈를 사회와 약속하고 그 결과물들을 륙속 펴내고 있다.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제반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주덕해, 김염, 김학철 등 우수한 인걸들의 전기를 이미 펴냈거니와 펴내는 작업을 창작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시간대에 놓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수년래 룡정이 배출한 인물들을 시리즈로 펴내고 있다. 이미 “별헤는 밤: 윤동주 평전”, “실크로드에 지다: 한락연 평전”, “청년문사의 꿈: 송몽규 평전”등 장편인물평전들을 발표했다. 강경애 평전도 바로 이 시리즈의 맥락에서 기획, 집필중이다.    “조선족문화의 발상지로 정평되는 룡정에서 태여난 나에게 있어서 고향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력사에 대한 소명의식은 쉼모르고 필을 들게하는 힘이요, 그 붓끝에 담아내는 묵향이다.     평전의 집필을 앞두고 또 한번 비암산 자락에 있는 강경애 문학비를 찾았다. 요즘 들어 룡정의 비암산은 풍경구 개발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비암산 자락이 온통 꽃밭으로 조경되고 유리잔도도 부설되여 일평균 8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호황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비암산 자락의 적요한 곳에 위치한 “강경애문학비”를 찾는 관객은 없다. 향락주의의 팽배에 유흥을 즐기면서도 막상 우리의 문학과 민족 선각자들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작금의 부박한 풍토가 처처에 엿보여 그를 조명하려는 필대를 무겁게 한다.    필대를 고누잡고 평전의 들머리를 여노라니 간밤에 내린 눈을 소복히 떠이고 있던 녀류작가의 햐얀 기념비가 여느때보다도 심중에 커다랗게 안겨온다. "장백산" 2019년 제1호  
409    김혁소설가와 그의 위안부소재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댓글:  조회:1212  추천:16  2019-02-12
대담 김혁소설가와 그의 위안부소재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문: 중국조선조선족 문단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김혁 소설가가 일전 련이어 장편소설 두부를 출판하여 또 한번 주목과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김혁 소설가는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 《노아의 방주》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뒤 꾸준히 필밭을 경운하여 지금까지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완용 황후》, 《시인 윤동주》, 《춘자의 남경》,《춘자의 남경》등 6부와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페스카마호 사건”, 인물칼럼집 "윤동주 코드", 인물전 "윤동주 평전", “한락연 평전”,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등을 출간. 발표했습니다.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연변주진달래문학상, 두만강문학상 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분과 주임, 룡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등 직을 맡고 있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두부의 작품은 도시진출붐 속의 조선족군상을 감성적 필치로 다룬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와 일본군 위안부의 력사소재를 다룬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이 선후로 출판되였습니다. 그중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은 아리랑 방송에 의해 라지오 소설로 개편, 새해 1월1일부터 전파를 타게 됩니다. 라지오 소설의 방송을 앞두고 “춘자의 남경”의 저자이신 김혁소설가를 만났습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김: 네 안녕하세요?   문:《춘자의 남경》은 작가님의 6번째 장편소설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섯부나 되는 장편소설을 창작하신 것도 대단하지만 이번 작품은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 이슈를 낳고 있습니다.《춘자의 남경》은 조선족문단 나아가 중국문단에서도 처음으로 호흡이 긴 서사로 장편화한 일본군위안부 소재라고 하는데 어느때 어느 간행물에 발표된거죠.   김: 네,《춘자의 남경》은 조선족의 권위문학지인《연변문학》지에 2015년 1기부터 1년간 련재됐고 올해 10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됐습니다. 작품은 30만자의 분량 속에 “뜨거운 감자”격인 소재의 일본군위안부와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20년대 연변지역에서 자행된 ‘간도참안’과 한인, 중국인 위안부들의 참상 그리고 말미에서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의 현장을 재현해 보이고 있습니다.   문: 그 창작경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시죠.   김: 네. 사실 이 작품에 대한 창작충동은 한 폭의 그림에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몇해전 어느 사이트에서 그 그림을 처음 보았습니다. 댕기 머리에 흰색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차림의 한 소녀, 그녀의 가녀린 몸을 감싸고 휘돌아가며 꽃이 피여오르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더러는 아직 봉오리를 틔우지 못한 자주색과 하얀색 도라지꽃이였습니다. 하고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눈물을 떨어뜨릴것만 같은 소녀의 얼굴에는 슬픔과 그리움같은것이 도료와 혼반죽이 되여 묻어 있다. 어딘가 미숙한 붓터치가 보이지만 애잔한 슬픔이 결을 이루고 있는 그 그림의 제목은 “못다 핀 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화가가 아닌 일본군위안부 할머니가 그린 그림이였습니다. 그림의 작가는 김순덕이라는 할머니였습니다. 꽃망울을 피우지 못한 봉오리 앞에 슬픈 표정으로 서 있는 소녀는 김할머니 자신이였구요. 경북 의령 출신으로 1921년 봄날에 태여난 김할머니는 가난을 이기지 못해 녀공을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서 일본군에 끌려갔습니다. 도착한 곳은 중국의 남경이였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는 그곳에서 “성노예”로 전락되여 하루에 몇십명의 군인을 상대로 청춘을 유린당했습니다. 김순덕 할머니가 미술치료의 일환으로 그린 이 작품은 한국과 일본, 미국, 카나다 등지에서 전시되였고 또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선물되면서 일제의 성(性)수탈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위안부할머니들의 아픔을 대변한 작품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또 중앙방송의 일곱시 뉴스를 시청하다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는데 뉴스에 의하면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이미 구상을 마무리한 다른 소재의 장편을 미루고 이 소재를 장편화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장순여(张纯如)라는 미국계 중국인 르포작가입니다. 작가이자 사학가인데 남경대학살에 대해 저술한 르포로 유명합니다. 그녀가 저술한 장편르포 “력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는 해외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켰습니다. 1937년의 그 겨울, 남경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 그 만행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린 보고서였습니다. 저자는 섬세한 필치로 남경의 대학살을 이야기했고 또 일본이 어떻게 력사속에서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 망녕되게 시도했는지 낱낱이 밝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순여의 량심적인 집필은 일본 극우세력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그들로부터 끈임없는 협박을 당해 왔던 장순여는 정신적 고통을 못이겨 2004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작가에 대해 중앙텔레비방송국 다큐프로에서 보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녀의 문명(文名)을 알린 이 장편르포를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습니다.   문: 작가님도 한때 매체에서 활약했던 기자출신이라고 들었는데요.   김: 네. “길림신문과 연변일보”에서 기자사업에 종사했었습니다.   문: 김혁 작가님은 1999년경에 일부 몰지각한 한국들인의 사기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습니다”를 집필, 출간했습니다. 그 르포집이 수천부가 팔려 당시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킨적도 있었습니다. 올해에는 또 한국어선에서의 조선족선원들과 한국선원들지간의 살인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페스카마호 사건”을 다루어 다시 한번 이슈를 일으키기도 했지요.   김: 네. 소설쓰기와 병행해 매체에서 20여년을 기자직으로 일해왔기에 저는 르포가 갖는 매력에 대해 십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같은 픽션작품도 좋지만 실화와 같은 논픽션 작품은 제가 아직도 애대하는 쟝르입니다.   문: 력사소설을 쓰려면 자료수집, 현장답사 같은 것이 선행 되여야 하는데 작가님은 어떻게 착수하셨는지요?   김: 네. 《춘자의 남경》의 집필을 앞두고 2014년 하반년을 옹근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 바쳤습니다. 사비를 팔아 남경으로 가서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300000”이라는 수자가 도처에 새겨진 기념관에서 일본군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만여점의 자료들을 둘러보면서 다시 한번 이 소재의 작품창작에 매진해야 할 각오를 머금었습니다 돌아와서 수십 부의 문사자료집과 피해 당사자들의 진술서는 물론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와 다큐, 드라마도 수십편 찾아보았습니다. 일본군국주의 실상을 깊이 료해하기 위해 수백만자에 달하는 대하실록소설 “태평양 전쟁”도 읽었습니다.   문: 그중에 작가님이 수작이라 생각되는 작품 몇편 소개해 주시죠   김: 네. 가와다 후미코라는 일본작가의 ‘빨간 기와집’ 그리고 한국작가 윤정모의 ‘에미이름은 조선삐였다’, 미국작가 모헤이더의 ‘난징의 악마’등 이 소재 관련 몇부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작가 엄가령의 남경대학살 소재 ‘금릉 13채’는 이미 몇해전에 읽었지요. 소설로서는 이 몇부가 작품성이 들쭉날쭉한 이 소재의 작품들중에서의 수작(秀作)이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조선족 학자들인 김성호의 실화 “종군위안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9년), 강용권의 기행문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과 오스트랄리아 얀.르부 오헤인의《침묵의 50년 한 위안부의 자술 (沉默50年:一位原“慰安妇”的自述》(중경출판사 2015年), 일본작가 이시가와 이쓰코의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 다니엘 최의 “나는 조선의 처녀다- 눈물로 쓴 정신대 위안부 이야기” 등 연구저서들이 내가 하나의 새로운 소설작품으로 픽션화하는데 특히 도움이 되였습니다.   문: 네 실로 많은 작품을 읽었고 꼼꼼히 준비하셨네요.   네: 그런데 뜻밖에도 기성의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어요.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그런대로 적지않은데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많았지요.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습니다.” 그 와중에 외려 위안부 소재의 소설작품이 일본 본토작가의 작품이 있는데 반해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없는데 대해 놀라움을 느꼈고 창작의 립지를 더 굳히게  되였습니다. 력사의 질곡에 갇혔던 불운한 그녀들을 대상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다 했습니다.   문: 김혁 소설가는 이 작품으로 제25회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동포작가들중 문학적 공적이 큰 작가들에게 시상하는 비중이 큰 이 상의 수상은 조선족문인으로서는 김철 시인 등에 이어 8년 만에 처음입니다.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는 작품에 대해 “조선족문단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의 당대문학에서도 주제령역을 승화시킨 중후한 작품입니다”라고 정평했습니다. 《춘자의 남경》은 또 중국작가협회에서 제정한 소수민족중점번역지원작품으로 선정되여 중국어번역을 마치고 북경의 작가출판사에서 곧 출간되게 됩니다.   문: 불과 십년사이에 김혁 소설가는 다섯부의 장편소설과 두부부의 장편르포와 문화시리즈 그리고 네부의 인물전기를 발표, 출간했습니다. 거의 한해에 한부꼴로 펴낸 셈입니다. 게다가 칼럼, 명상록, 소설, 편찬저서들도 곁들면 이 동안 그의 창작량은 그야말로 문단의 평론가들이나 원로들이 격찬할만큼 “전무”할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가 평론가들이 평하다싶이 “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소재로 서사적 사건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그럼 향후의 창작성향과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김: 네. “력사라는 거대한 거푸집 안에 민족의 스토리와 애환을 무늬결 섬세하게 새겨넣은 력사물에 대한 작업이 요즘 내가 하는 전부의 일입니다.” 매체의 언론인과 소설가의 삶을 병행해 왔기에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저의 작품의 특색이라 말할수 있고 이것이 남보다 차별화되는 나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뢰할 만한 소설 창작 기량을 발휘해 주제와 소재의 명징성, 소설적 사건의 이미지화와 깔끔한 흐름등이 잘 조합되여 있는 대서사적인 작품을 다루는것이 나의 금후의 창작의 한방향이 될 것입니다.   문: 민족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방대한 작품량으로 묵직한 소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 있는 김혁 작가님, 육성으로 다시 듣게 되는 “춘자의 남경”, 그의 라지오 소설이 기대됩니다.   김: 감사합니다.  / "아리랑" 방송 12월 24일  
408    김혁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한문판 출간 댓글:  조회:680  추천:12  2019-02-12
김혁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한문판 출간   --중국문단에서도 처음으로 호흡이 긴 서사로 픽션화 한 일본군 위안부 소재,   중국의 당대문학에서도 주제령역을 승화시킨 중후한 작품   조선족 소설가 김혁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이 최근 작가출판사에 의해 한문(汉文)으로 출간됐다.   2016년도에 중국작가협회소수민족문학 번역지원작품에 들어 출판된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은 조선족문단 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국문단에서도 처음으로 호흡이 긴 서사로 픽션화 한 일본군 위안부 소재이다.   지금까지 조선족은 물론 중국문단에서도 위안부소재를 다룬 소설작품은 얼마 안된다. 력사의 사실로 기록된 위안부는 전쟁속 엄연한 희생양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극우세력은 세계여론의 반대에도 불과하고 교과서를 뜯어고치고 력사를 왜곡 부인하고 있다. 소설가 김혁은“춘자의 남경” 창작과정에 대해 “력사의 질곡에 갇혔던 불운한 그녀들을 대상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골수 깊은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 싶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연변대학 우상렬교수는 작품에 대해 “조선족 문단 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의 당대문학에서도 주제령역을 승화시킨 중후한 작품이다”라고 정평했다.   한편 “춘자의 남경” 한문번역은 연변라지텔레비죤방송국 보도쎈터의 주임조리, 부편심이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연변대학 번역석사생 도사인 근욱이 맡았다.   현재 “춘자의 남경”은 연길아리랑방송에서 라지오소설로 각색되여 인기리에 련재방송중이다.   김혁은 중국작가협회 회원이며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사단법인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등 직을 맡고 활약하고 있다.   안상근기자  [ 길림신문 ]  2019-01-24  
407    젠더(gender) 시점으로 읽는 김혁의 장편소설“춘자의 남경” 댓글:  조회:782  추천:7  2019-01-27
    . 평론 . ​ 대상화와 소외화의 장치 해제를 위한 열쇠 - 젠더(gender) 시점으로 읽는 김혁의 장편소설“춘자의 남경”   시노무라 리에 (교토 불교대학, 문학박사) ​   ​ 들어가면서 ​ 우선 여기에서 말하는 젠더란 무엇인가, 그 개념에 대해 분명히 밝혀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요즘에도 곡해된 젠더개념들이 표류되고 있기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젠더(gender)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성(性)차이’이다. 즉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서 보여지는 남성과 녀성의 구별이다. 남성성과 녀성성이 생리적인 차이로부터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젠더는 단지 구별이지 차별은 아니다. 그런데 오랜 력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유교적가부장제도하에서, 그리고 전통적인 문화환경속에서 형성된 남성성과 녀성성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성적 역할분담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녀성을 “제2의 성”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녀성의 지위가 사회와 가정에서 낮았음으로 인해 녀성문화(정신문화와 물질문화)가 차별시되고 무시되여 왔다. 그 녀성성(녀성문화)이 근대에 들어서서 페미니스트와 인류학자, 민속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여 가치가 부여되고 정당화되였다. 말하자면 반제도적이었던 것이, 반문화적이었던 것이 정당화 되여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되였다. 따라서 페미니스트가 이 시점으로 작품을, 특히 남성 작가의 작품을 논할 때엔 늘 신랄한 비판과 야유가 쏟아지군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젠더리론에 대해 승인하고 있다. 남성성과 녀성성의 존재를 승인한다면 한 작품을 둘러싸고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작자와 독자사이, 그리고 독자사이의 성적 차이에 의한 충돌은 피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상정내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충돌도 결국에는 그 작품에 귀속되는 것으로서 충돌에 의하여 작품의 세계가 보다 넓어 지게 된다. 작자 김혁씨가 나에게 작품을 보여 주었을 때엔 아마 이 점을 념두에 두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작품에 다루어진 문제가 문제인 것 만큼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다룬 소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에 대해 진지히게 고민해본적은 없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녀성독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  현실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또한 전쟁의 참혹성을 말해주기 위한 산 증명이고 강유력한 력사 자료이다. 통치배의 폭력과 침략자의 만행에 의해 인권과 녀성권을 박탈당한 피해자중의 피해자이다. 폭력과 만행을 폭로하고 슬픔과 아픔을 전하는데 있어서 실물과 실언보다 더 유력하고 감화력이 있는 표현이 따로 있을까? 명명백백한 실제 사실을 굳이 허구로 표현하려 했을 때엔 현실을 의식영역에 끌어 올려 전술한 현실적 의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파헤치기 위해였을 것이다. 작자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했고 어떤 문제를 내 주었을까? 소설이라는 문학쟝르에 설치되여 있는 가지가지의 대상화, 소외화의 장치를 과연 어떻게 해제할 수 있을까?   마술에 의한 실상과 허상의 숨바꼭질     우선 작자가 어떤 마술로 사실을 허구로 꼬았는가, 아니, 어떻게 허구라는 실로 사실이라는 구술을 꿰였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은 봇짱 시계탑 앞에서 시작되여 봇짱 시계탑 앞에서 끝난다. 이것이 우선 로련한 소설가의 첫번째 테크닉, 꾸밈새이다. ​ 나쓰메소세키의 문학에 도취되여 있는 조선족 청년 종혁이와 그런 종혁에게 반해버린 하루꼬가 시간을 공유하려고 한다. 청년 남녀의 이 행위가 상징하는것은 즉 미래를 함께 하고저 하는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 앞에 장애가 나타난다. 하루꼬의 할아버지이다. 하루꼬의 할아버지를 이어 종혁의 할머니, 나아가서 력사가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있다. 그들이 과연 이 모든것을 이겨내고 맺어 질수 있을까? 드라마나 소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의 패턴, 로미오와 줄리에의 패턴이다. 이렇게 꾸며진 이 러브스토리가 소설을 처음에서 마지막으로 이어가는 주선이다. 스토리를 엮어나감에 있어서 굳이 흔히 있는 패턴을 선택했을 땐 작자가 노리고 있는 것이 이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 소설에서 허구의 분위기를 북돋아 주는것은 하루꼬의 ‘할아버지’라는 기묘한 캐릭터이다. 다른 등장인물은 실재한 인물을 모델로 했거나 현실속에 있을수 있는 인물이지만 유독 이 ‘할아버지’만이 그 어데도 없는 인간이다. 이것이 두번째의 꾸밈새이다. ​ ‘량쪽으로 치켜 올라간 카이저 수염’,  ‘절의 문켠에 선 수문장처럼 찢어져 올라간’ 두 눈섭에 ‘채도가 칙칙한 기모노 옷차림’으로 개화장을  휘두르는 ‘할아버지’는 일본 에도말기나 메이지시대에서나 볼수 있는 인물상이다. 전설속의 인물같기도 하고 어덴가 소세키를 닮은것 같기도 한 외모이다. 현재 천엔짜리 지폐에서 소세키가 사라진것처럼 일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보습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실은 남경에 간적있는 원 일본군, 즉 가해자이다. ‘할아버지’의 형상에는 일본 전설속의 용맹한 무사나 근대문학사의 대문호, 그리고 극악무도한 전쟁범 등 여러 인물상이 겹쳐져 있다고 볼수 있다. 일본이 갖고 있는 여러 얼굴이 겹쳐진 상징적인 캐릭터이다. ​ 다음 세번째 꾸밈새는 이름의 일치이다.  춘자와 하루꼬는 각기 조선어와 일본어로서 발음은 다르지만 한자 표기는 일치하다. 봄 春자에 자식 子자이다. 봄에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다. 근대 언문일치운동 이전에 조선이나 일본은 모두 漢文을 正統文, 美文으로 인정하고 썼다. 근대에 한자를 거의 버리다싶이 한 조선민족이지만 이름을 한자로 짓고 한자로 쓰는 문화가 아직 남아 있다.  춘자의 봄은 아픔과 슬픔과 굶주림과 죽음의 계절이였다. 한편 일견 풍요로운 물질세계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는듯한 하루꼬이지만 정신상 고뇌에 시달리고 있다. 춘자와 하루꼬는 각기 자신을 원점으로 하는 자그마한 원안에서 돌았었다. 종혁이와 하루꼬의 만남이 없었다면 두 원은 서로 아득히 멀리 떨어진채 영원히 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표면상 종혁이에 의하여 두 원이 우연히 접하게 된 것으로 보여주면서 이름의 일치로 실은 그 것이 필연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두 원의 접함은 춘자와 하루꼬가 태여나기전에 먼 옛날 고대에 벌써 약속되여 있었다. 둘은 서로 접해야 하고 겹쳐져야 할 숙명이였다. 하여 필연적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남경(난낑)에서 겹쳐지게 된다. ​ ‘춘자의 남경’과 ‘하루꼬의 난낑’이 바로 네번째 꾸밈새이다.  위의 꾸밈새들은 모두 이 네번째를 위하여 준비된것이라고 볼수 있다. 여름 방학에 종혁이와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을 따라 ‘난낑”에까지 간 하루꼬였지만 차마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만행을, 그 만행하에 처참히 쓰러져 간 죽음들을 직시할 수있는 용기조차 하루꼬에게는 없다. 고물시장에서 장사치들의 경멸과 수모를 받는 하루꼬는 가해자의 손녀로부터 일변하여 피해자로 된다. 하루꼬를 피해자로 만든 진정한 가해자는 바로 ‘할아버지’이다. 여기서 춘자와 하루꼬는 완전히 겹쳐진다. 가해자 ‘할아버지’가 저지른 만행의 피해는 동시대의 춘자를 비롯한 타민족 녀성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70년후에 자신의 혈육인 하루꼬에게까지 미쳤다. ​ 소설의 세부마다 보여지는 작자의 테크닉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논하기엔 편폭의 제한이 너무 크다. 마법 풀기를 이만쯤 해 놓아도 작자가 보여주려는것이 뚜렷이 나타난듯 싶다. 상술한 허구에 의해 부각된것은 모두 허상(현실속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나 사건)이다. 그런데 이 허상이 아니면 보여 줄수 없는 실상(현실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나 사건, 또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자. ​ 그런데 이 소설을 단순한 허구로 읽기엔 너무나도 많은 실상이 산재되여 있다. 사슴골의 참변으로 부터 시작하여 ‘상남군부위안소’, ‘상북군부위안소’, ‘일본군 위안부’, 남경대학살,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실재적 존재이다. 이러한 실상을 다룸에 있어서 작자는 두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 하나는 리얼한 묘사이다. 18세기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사실주의사조의 뒤를 이어 전 지구를 휩쓴 자연주의사조에 의해 완성된 리얼리즘의 모사(模寫)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것이였다. 흔히 작자자신의 경험과 인생 그자체였다. 소설 “춘자의 남경”의 리얼한 묘사는 작자자신의 경험에 의한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생동하여 당혹감조차 주는 소설속의 ‘리얼한 묘사’는 리얼리즘과는 다른것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또 하나는 허구화이다. 사슴골의 참변으로 부터 ‘일본군 위안부’사건, 남경대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실제사실들이 춘자라는 인물형상에 의해 하나로 이어지고 다시 종혁이와 하루꼬의 러브스토리와 얽힌다. 실제사실뿐만아니라 흑룡강성 동녕현에서 발견된 피해자 할머니를 비롯하여 실재한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자가 모두 한 선으로 이어진다. 소설에 그려진것이 실재한 인물과 사건이기에 실상이라고 믿고 잡아 보려면 잡을수 없는 허상이다. 작자의 마술에 의한 실상과 허상의 숨바꼭질이다. 작자는 현실을 허구화하였고 형이하학적인것을 형이상학적인것에로, 물리적 령역의것을 의식적 령역에 끌어 올렸다. 하여 현실속에서는 일어 날수 없는 현상을, 즉 실상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을 허상을 통하여 표현할수 있었다. 점점이 널려 있던 하나하나의 아픔과 고통이 춘자의 형상에 집결되고 거대화되여 피해자가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하루꼬의 ‘할아버지’ 형상은 물론 사슴골 참변을 일으킨 일본군이나 남경대학살을 감행한 일본군, 그리고 춘자의 몸과 령혼을 짓밟은 일본군의 추악한 형상과 겹쳐진것이다. ​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작자는 그를 무자비한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성격이 괴벽하기는 하지만 고양이들을 살뜰히 껴안고 쓰다듬어 주는 따스한 인간이고 무엇보다도 손녀를 끔찍히 여기는 인정이 많은 인간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머리속에 그리고 있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그리고 있을 ‘피해자의 이미지’와 ‘가해자의 이미지’, 즉 의식속의 실상인 것이다.  소설에서 하루꼬의 ‘할아버지’는 끝내 속죄를 하지 않고 가해자인 채로, 춘자도 끝내 용납을 못하고 피해자인채로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춘자와 하루꼬의 겹침이 의미하는것처럼 가해와 피해, 속죄와 용서는 두 사물의 두 문제인 것이 아니라 한 사물안의 한 문제이다. 종혁이도 하루꼬도 피해서 갈수 없는 문제이다. 하여 종혁이는 이 모 것을 다 끌어 안고 가려고 한다. 종혁(또한 작자)의 변증법적 철학관의 형상화이다. 종혁이는 도망하려는 하루꼬를 붙잡으려 하고 하루꼬와 다시 봇짱 시계탑앞에 선다. 실존주의적 사상에 립각한 종혁의 주동성과 책임성이 있는 행동이다. 이는 작자가 독자들에게 내준 문제이기도 하다.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연변인민출판사 2018년)   객체화와 소외화의 견고한 장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성폭행, 남경대학살과 같은 만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하여 유관 증명자료들을 없애려 하고 사건자체를 부인해 왔던 일본의 우익적 인간들도 엄연한 증언과 증명자료 앞에서 이젠 부인할수 없게 되였다.  더는 부인할수 없게 되자 이제는 다른 구실을 찾는다. 당시 남경의 인구가 30만이 안 되었는데 어떻게 30만이 학살되였다고 할수 있느냐고 수자라도 줄여 보려고 떼를 쓴다. 그리고 일본군에만 위안부가 있었느냐, 미국군에도 있었고 한국군에도 있었다 운운 련대자를 찾아 책임을 회피하려거나 수치감을 덜려고 한다. 혼자 벌을 받기보다 함께 받는 상대가 있으면 수치감을 덜수 있다는 소학생들이나 해보는 유치한 생각이다. 원 오사카시장 하시모토도오루가 몇년전에 이런 망언을 하여 세계의 주목거리로 된적이 있다. ‘위안부’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결핍한것은 물론 이런 말을 내뱉는 심사가 비틀어진 것이고 태도가 건방지기 그지없다. ​   ‘위안부’문제의 본질을 해명하려면 그 발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캐야 할것이다. 한마디로 찍어 말해서 남자들의 성욕을 채우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제도화한데서 온 것이다. 남권사회의 가부장제도는 남자의 혈통과 성으로 이루어 지고 이어져 내려가는 가문제도이다. 가문의 번영창성과 나아가서 나라의 번영창성을 위한 남자의 성행위는 정당화 되고 제도화 되였다. 남근중심주의의 극단화가 만든 것이 기방(일본에서는 遊廓)제도이다. 녀자를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물질화한 것이 기생, 또는 遊女이고 기생, 유녀가 바로 ‘위안부’의 모델이다. 일본의 유곽은 아즈치모모야마시대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치세(1585년-1603년)하에 권력의 통제와 보호를 받아 성립되였다. 근대 자유민권운동과 더불어 일어난 녀성해방운동의 추동하에 1872년, 메이지정부는 예창기해방령을 내렸지만 실제상 폐지된것은 극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유곽이 이름만 바꾸고 영업을 계속하였다. 간자키키요시의 보고(“매춘” 1974)에 의하면 1946년 1월24일, GHQ(연합국군 총사령부)의 공창제도폐지명령에 의하여 업체 316개, 창기 1만417명이 폐지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전을 선포한 사흘뒤, 내무성경보국장 하시모토마사미가 각청부현장관에게 ‘진주군(進駐軍)특수위안시설을 만들라’는 명령을 무선전으로 발사하였다. 26일, 경시청의 청탁을 받은 업자들이 모여 자본 1억원으로 RAA(특수위안부시설협회)를 설립하여 27일 개업하였다. ‘전후처리 국가긴급시설에서 신일본녀성 모집’이라는 광고를 내고 1360명을 채용(간자키 1974)하였다. 1946년 3월21일, 위안부의 90퍼센트, 미국군인 70퍼센트가 성병에 걸렸다는것을 파악하게 된 GHQ는 급기야 ‘미군장병의 일본부인에 대한 공공연한 애정 표시’를 금지시켰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베아테・시로타・골돈 등의 지도하에 녀성참정의 새 선거법(1945년 12월), 남녀 평등교육법 등이 성립되였다. 녀성해방을 위한 일본정부의 움직임이 얼마나 철저한 내적 반성이 결핍한, 외부 압력에 의한 억지공사였는가를 알 수 있다. 전쟁후의 일본은 페미니즘의 이론만 방대하고 실천이 결핍하였다. 바로 전쟁후의 이런 일본의 사회환경이 하시모토와 같은 인간을 길러냈다.    각설하고, 가문의 순결한 혈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녀성의 성욕은 금지되여야 했다. 하여 녀성의 신체는 아이를 낳아 주는 신체와 성욕을 만족시켜 주는 신체로 이분화 되였다. 전자가 물론 녀성의 기범이다. 한편 정당화 되고 제도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생은 신분이 미천했고 멸시를 받았다. 왜냐하면 기방제도가 유가의 도덕에 어긋나기 때문이였다. 기생의 미천한 신분과 그에 대한 사회전반의 차별시는 바로 남근중심사회 자체의 모순의 악과이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원 ‘일본군 위안부’가 선뜻 증언에 나서지 못한것도 바로 사회전반에 침투되여 있는 이러한 봉건적 사상관념때문이였다. 경멸의 눈총과 비난으로 하여 또 다시 상처를 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후 ‘일본인 노리개’라는 죄목으로 꼬깔모자를 쓰고 목에 헌 신짝을 걸고 조리돌림을 당한적 있는 춘자는 한국에서 온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앞에서 좀처럼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헌 신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어 낡은 신(破鞋)은 남권사회에서 기생을 모욕하는 말로 씌였을 뿐만아니라 여러 남자와 성적관계를 맺는 녀성에 대한 목욕적인 말이기도 했다. 녀성의 성기가 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웠다는 설도 있고 옛날 북경의 유명한 팔대골목에 문패가 없이, 즉 관가의 허가가 없이 사사로이 문패대신 꽃신을 걸고 남자 손님을 받은 집들이 있었는데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니 새 신이 물이 날아서 낡은 신이 되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것이라는 설도 있다. 녀성에 대한 모욕적인 말이나 표현이 공공장소에서 꺼리낌 없이 사용되였다는것은 해방후에도 의연히 사회에 남권사회의 낡은 관념이 농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불원천리하고 간신히 어머니곁으로 돌아왔건만 춘자는 어머니한테 냉대를 받는다. 어머니한테서마저도 소외화되는 춘자의 이중, 삼중적인 피해를 그림으로써 작자는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과 일본군의 악행을 보여주는 피상적인 묘사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원 ‘일본군 위안부’들이 증언에 나서게 된 때는 이미 ‘기생’이라는 단어가 사어로 되였고 상술한 낡은 관념이 희박해져 그들을 소외화 하는 제도적 문화적 장치가 다소 풀려졌을 때였다. 원 ‘일본군 위안부’들을 보호해 줄수있는 사회제도와 문화배경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증언을 하려면 또 한가지 각오해 두어야 할 문제가 있다. 성폭행의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가 몸소 증언을 한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끊임 없이 자기자신을 객체화하고 물질화하는 과정이였다. 현실속에서 성폭행피해자가 기소를 철수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타자를 향해 성폭행과정을 적라라하게 공개할 때마다 그들은 끊임 없는 자기자신의 타자화와 소외화를 통하여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견딜수가 없어서 기소를 철수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에서 종혁의 어머니의 설득에 의해 겨우 입을 열려고 한 춘자였지만 남성 청중은 견결히 거부한다. 손자인 종혁이도 례외가 아니다. ‘스나들은 나가줍소’, ‘그래 아매가 제 손자새끼한테꺼정도 제를 홀딱 벗길 그 맴이 아픈 얘기를 해야 되오’는 춘자의 령혼의 부르짖음이다. 실존의 각도에서 보면 춘자의 수치심은 녀성인 춘자의 남성앞에서의 자기자신에 대한것으로서 수치심을 통하여 한 인간으로서 뿐만아니라 한 녀성으로서의 가능성의 죽음과 자기자신의 근원적인 실태를 경험해야 한다. 작자는 이 부분을 필묵을 들여 그리고 있다. 물론 작자의 의도가 일제의 만행이 70여년전 ‘일본군 위안부’에 가한 육체적인 폭행에서 끝난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피해자 녀성들의 령혼마저 무참히 짓밟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진실을 형상화 하려는데 있었을것이다. 그러면서 증언자체가 춘자를 소외화하는 또 하나의 견고한 장치임을 제시한다. ​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를 문학작품에 그린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녀류문학’이라는 단어가 세기초 내가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에 재적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활용되고 있었던 사실이 말해 주다싶이 근대문학은 남성문학이였다. 이른바 정통적인 문학사는 남성문학을 주축으로 엮어지고 ‘여류문학’은 주변문학으로서 ‘그 외에’의 형식으로 슬쩍 언급되거나 아예 무시되여 버렸다. 그도 그럴법하다. 근대에는 엘리터 남성을 맹주로 문학결사가 이루어지고 여러 유파를 형성하였다. 문학을 지향하는 녀성도 엘리터 남성의 문하생이 되여 추천을 받아야만 동인지에 발표를 할수 있었고 작가로 인정 받을수 있었다. 조선반도나 중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다고 할수 있다. 하여 근대소설은 남성의 사유방식과 론리체계에 따라 구성을 이룬 문학쟝르라고 할수있다. 그 근저에는 남근중심사상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재녀라 할지라도 녀성문학은 주변화 될수밖에 없었다. 녀성은 녀성의 고유한 문체를 발견했을 때만이 비로소 진정으로 문학을 소유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문학에서 양적으로 남성문학이 압도적이었으니 근대문학에 넘쳐나는것은 당연히 녀자의 신체묘사이다. 쓰보우치쇼요가 회화의 이론을 소설리론에 도입하여 사실주의로부터 시작된 근대일본소설에는 처음부터 근대적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세상을 객체화 하고 타자화 하는 기능으로서의 개인(남성)의 눈이 장치되였다. 반자연주의 기수인 나쓰메소세키의 문학이 일본을 풍미했던 20세기초에 도일하여 근대소설을 배운 로신과 리광수를 개척자로 하는 중국근대문학과 조선근대문학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남성의 시각에 의하여 관찰되고 모사된 녀성은 미화되고 신성화되기도 하였는가 하면 또 추화되고 비하되기도 했다. 설사 그 묘사가 녀성해방을 위한 혁명적인것이라 할지라도, 또 설사 그 것이 억압된 의식하에 있는 해방의 기동력으로서의 성묘사라 할지라도 거기에 투영된 것은 남성의 기호이고 성적인 욕망이며 관념이다. 결과적으로 녀성을 남성의 창조력안에서 성적소비의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객체화 되고 타자화 되고 물질화 되고 소외화 되는 이미지를 대량 생산하였다. 이에 녀성작가들, 특히 전후 현대녀성작가들은 보복이나 하려는듯이 같은 방법으로 남성을 대상화 하였다. 이것이 문학에서 발생하는 젠더현상이다. 문학속에 설치되여있는 이와 같이 견고한 장치때문에 소설에 ‘일본군 위안부’를 그린다는것은 그야말로 외줄타기와 같이 위험한 일이 아닐수 없다. 자칫하면 피해자 녀성을 다시 현대 남성의 욕망의 지배하에 전락시킬수 있기때문이다. 하여 작자에게 제기되는 물음은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셋째도 왜 ‘일본군 위안부’를 그리는가이다. 이는 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결과론적인 문제이다. ​ 상술한바와 같이 소설 “춘자의 남경”이 진실을 철저히 허구화 하여 형이하학적인것을 형이상학적인 차원에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소설속의 리얼한 녀성의 신체묘사와 성묘사는 실존임과 동시에 관념이다. 작자는 ‘일본군 위안부’사건을 재현시키려고함과 동시에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그 사건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과정과 인식의 과정을 그리였다. 70여년전의 지금 이 순간 즉 ‘이 때’, ‘이 곳’, ‘이 것’이라는 실존의 재현으로부터 70여년후에 회억으로 의해 나타나는 ‘그 때’, ‘그 곳’, ‘그 것’, 그리고 그 회억이 물질화 되여버린 ‘저 때’, ‘저 곳’, ‘저 것’이 다시 당사자가 아닌 후세의 사람(타자)들의 의식속에서 관념화 된다. 악몽의 력사가 되풀이되여서는 안된다. 봇짱 시계탑앞에서 다시 만난 종혁이와 하루꼬는 그들에게만 소유될 지금 이 순간 ‘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이 미래를 향한 ‘이 때’, ‘이 곳’의 ‘이 것’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거듭 되풀이하지만 종혁이는 춘자도 하루꼬도, 그리고 춘자와 하루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끌어 안고 미래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것은 종혁(또는 작자)의 변증법적 철학관의 표현이고 또 휴머니즘 사상의 표현이다. 이렇듯 작자는 현실적인것을 의식의 령역에로 끌어올리는 것으로써 상술한 문학속에 설치되여 있는 견고한 장치를 해제하고저 하고 있다. 총적으로 볼 때 가장 관건적인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객체화, 소외화의 장치는 해제하였지만 그러나, 국부적인 면에서 론쟁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 이 작품은 누가 읽어도 남성문학일것이다. 하루꼬의 외모라든가 일본인 ‘위안부’인 시오노 등 녀성등장인물의 신체묘사에서 느껴지는것은 역시 남성의 눈길이다. 또한 그 것은 작자의 눈길이기도 하니 녀성독자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남성작가와 녀성작가를 막론하고 문학령역 전체에 남겨진 숙제이기도 하다. 남성성과 녀성성의 차이를 무화하려는것은 극단적이고 또 불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상술한 폐단을 극복하면서 성차이를 표현할것인가 이다.   제3의 눈의 암시 ​ 이 소설에는 각기 다른 립장에서의 서로 다른 시점이 존재한다. 즉 피해자의 시점과 가해자의 시점, 피해자의 후손의 시점과 가해자 후손의 시점, 그리고 전지전능의 화자(작자)의 시점, 독자의 시점, 남성의 시점과 녀성의 시점 등 다각적인 시점이 제기되였다. 그런데 소설에는 또 피해자의 눈도 가해자의 눈도, 그리고 남성의 눈도 녀성의 눈도 아닌 제3의 눈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눈’은 력사와 사회를 보는 력사관과 세계관이다. 여기서 ‘제3의 눈’이란 바로 고양이의 눈이다. ​ 소설의 첫 시작에서부터 등장한 고양이는 하루꼬의 할아버지의 곁에도 있고 종혁의 할머니의 곁에도 있고 일본군 위안소에도 있었다. 작자는 또 제3부에서 ‘봄을 우는 고양이’장을 설치하여 그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원 ‘일본군 위안부’ 춘자의 손자 종혁이는 도쿄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에서 나쓰메소세끼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나쓰메소세끼문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역시 그를 소설가로 만든 대중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떠올릴것이다. 이름 없는 수코양이 ‘이몸’(吾輩)의 눈으로 본 인간사회의 단면을 풍자와 해학의 수법으로 그린것으로 유명하다. 소설속에서 종혁이와 하루꼬도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은 소세끼가 37살 되던 해(1904년)에 그의 집에 기여들어온 검은 털의 길고양이이다. 고양이는 1908년9월13일에 죽었는데 그 때 소세끼는 모처럼 친한 지인들에게 고양이의 죽음에 대한 통지를 내였다고 한다. 종혁이가 이러한 소세끼문학을 연구한다는 설정은 실은 고양이의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 우선 화자와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은 하루꼬가 도쿄에서 잠시 시코쿠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있는 실가에 내려와 할아버지앞에서 다도를 표현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이문화속의 등장인물과 독자(일본인외의 독자)의 시선이 서로를 대상화하고 또 각기 자기자신을 대상화하게 한다. 차문화를 둘러싼 전통과 미학의 차이가 서로가 타자임을 확인하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문화는 달라도 인정은 매일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의 건강을 우려하고 있는 손녀의 마음과 그런 손녀를 애모쁘게 여기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독자는 인츰 자신과 등장인물을 동일시하게 된다. 독자는 자신의 시선을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시선에 일치시켜 그들의 눈을 통하여 사물을 보고 그들의 운명을 걱정하게 된다. 지어는 ‘할아버지’가 막무가내로 손녀의 련인이라고 자처하는 종혁이에게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하여도 좀 괴벽한 성미이지만 손녀를 끔찍히 아끼는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리해까지 하게 된다. 하여 종혁이가 외려 객체화된다. 다음, 소설은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시점에서 종혁이와 ‘할머니’의 시점에로 옮긴다. 이문화가 아니라 자문화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에 독자는 처음부터 자신을 겹쳐 본다. ‘할머니’뿐만아니라 이문화속에 이방인으로 등장하여 객체화되었던 종혁이도 하루꼬와 위치를 바꾸어 주체화되고 이번에는 하루꼬가 이방인으로 등장하여 객체화된다.  여기에도 서로를 끔찍히 사랑하는 조손이 있다. 독자는 종혁이와 ‘할머니’의 시선으로 사건의 진전을 지켜보게 된다. 인지상정의 시점에서 볼 때 하루꼬는 ‘할아버지’를, 종혁이는 ‘할머니’를 배신할수 없는 립장에 세워져 있다. 이렇게 하루꼬와 ‘할아버지’, 종혁이와 ‘할머니’에 밀착해 있던 전지전능의 화자는 이번에는 수십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슴골 사람들에게 밀착하여 ‘지금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악몽의 참변을 그린다. 우선 쫓기고 있는 끝순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가 다시 타임슬립하여 그 얼마전에 있었던 일을 ‘우물댁’, ‘마을 사람들’, 룡정 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초점을 둔다. 그 와중에 태여나는 춘자의 출생을 계기로 화자의 초점은 어머니 끝순으로부터 춘자에게로 옮겨진다. 이하 화자는 기본상 춘자에 밀착하여 일련의 사건들을 현재진행형으로 그린다. 춘자와 다른 자매들의 립장에서 야수와 같은 일본군과 그들의 만행을 적대시하고 비하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다시 70년후의 현재 종혁이와 하루꼬의 몸에 밀착한다. 그들이 볼수있는 것은 길림성 기록보관소에 남은 일본 관동군의 문서나 련합군이 남긴 사진, 그리고 보호문물로 남은 위안소건물,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설치된 극렬한 모습의 조형물 등이 전부이다. 그들은 춘자와 피해자들이 본 침략자의 만행을 그대로 볼 수 없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경험할수 없다. 그들이 할수 있는것은 다만 물체화 된 ‘저 것’에 눈길을 주는 것을 통해 가해자의 극악무도한 만행과 피해자의 형언할수 없는 고통을 관념화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세상의 시점을 ‘저 것’에 모으는것뿐이다.  이어서 화자는 다시 하루꼬와 ‘할아버지’에 초점을 맞춘다. 파이프에 새겨진 글자의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할아버지’가 다름아닌 70여년전의 가해자임이 밝혀진다.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눈길이 서로를 객체화하고 타자화한다. ‘할아버지’는 끝내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하고 침략군의 군가를 부르며 가해자인채로 죽어간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향한 독자의 시선도 ‘할아버지’를 철저히 타자화할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종혁의 몸에 밀착한채 다시 이문화속으로 들어간다. 그저 ‘이문화’라 하기보다 이번에는 ‘가해자의 문화’라 하기가 적절할것이다. 종혁이는 그런 타문화속에 자기를 내주는 것으로 주체화를 실현한다. 종혁이는 일본근대문학의 전형적인 쟝르인 하이쿠로 력사를 직시할수 없어 사랑앞에서 도망하려는 하루꼬를 잡으려 한다. 일본문화속에서 주체를 획득한 종혁의 시선에 의해 일본의 지방문화인 마쓰야마의 전통문화가 객체화되여 간다. ​  이와 같이 전지전능의 화자(작자)는 여러 등장인물에 밀착하면서 그 인물의 시선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의 시선까지 대상화하는 ‘제3의 눈’이 있다. 즉 고양이의 시점이다. ​  하루꼬의 할아버지는 ‘흰 바탕에 검은색의 점이 어우러져 있고 짧고 몽툭한 꼬리와 삼각형의 머리, 빨쪽한 큰 귀를 가진 토종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련인인 종혁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하려하나 끝내 입을 열지 못하는 하루꼬는 고양이의 호동그란 눈을 들여다 보며 말을 돌린다. 이 순간 인간이 아닌 고양이의 눈에 의하여 하루꼬는 물론 등장인물들이 상대화된다. 뿐만아니라 고양이의 눈길을 마주하는 류사체험을 하게되는 독자도 상대화된다.  이렇게 소설의 첫 시작에서부터 등장인물과 독자의 시점을 대상화하고 객체화하는 또 하나의 시점이 제시된다. 독자는 시시각각 이 초인간적인 ‘제3의 눈’을 의식하고 소설을 읽게 된다. 고양이가 두번째로 등장한것은 종혁이가 하루꼬를 데리고 찾아간 ‘할머니’의 집에서이다. ‘일신이 까만 고양이가 종혁이를 보고 울었다. 할머니 대신 고양이들이 손님을 반겨맞아주는듯 했다’. 독자는 여기에서 처음에 등장한 하루꼬 실가의 고양이들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한국에서 온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의 등장으로 하여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음이 밝혀지면서 가해자 일제라는 추상적인 력사개념이 막연하게 부상한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요즘 하는 짓거리가 어떠하며 그들이 저지른 위안부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은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다는걸’ 라고 하는 종혁의 어머니의 말에 의해 그 것은 결코 지나간 력사가 아니라 현재진행중의 사건이라는것이 확인된다. 70여년전에 중국과 조선을 비롯한 아세아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일제’와 패전후 속죄는 커녕 지은 죄를 인정조차 하지 않고있는 현재 ‘일본사람들’과의 링크가 하루꼬와 고양이에 향한 ‘할아버지’의 ‘애모쁜 눈길’을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재현시킨다.  여기서 고양이의 ‘눈’은 서로 대립되는 시점의 존재 즉 패러독스를 제시한다. 다음, 고양이가 세번째로 등장한것은 일본군위안소이다. 철창속 같이 밀페된 공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뿐이다. 야수와 같은 놈들한테 처참하게 유린당한 춘자는 밥 먹을 기운조차 없다. 거기에 제3자인 고양이가 기여든다. ‘고양이는 살금살금 늦은 보법으로 들어와 춘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음식그릇에 덮쳤다. 혀를 날름이며 순식간에 춘자의 밥을 다 먹어 버렸다’. 이 곳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든, 또한 자기가 먹으려는 것이 비절참절한 처경에 처한 피해자의 밥이든 고양이는 상관하지 않는다. 여기서 고양이는 사건 당사자외의 제3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사건에 대한 판결과 가해자에 대한 징벌,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늘 제3자에 의뢰하여 해결된다. 그런데 그 제3자란 이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랭혹한 존재이다. 부조리한 일이지만 공정한, 조금도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주관으로서의 제3의 시점이다. ​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령혼을 달래주는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할머니’가 떠나간 빈 집에는 ‘할머니’가 생전에 기르던 고양이들만 남았다. ‘마쓰야마의 할아버지가 키우는 명품 고양이인 “재패니즈 밥테일”에 비하면 일견에도 어딘가 짝지는 수수한 물종의 고양이였다. 하지만 그 수수함에서 남다른 친화감이 엿보이는 시골농가의 고양이였다’. 명품이든지 물종이든지 하는 것은 고양이 자체의 본질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부여한 가치이다. 고양이들한테 붙여진 ‘일본군 위안부’들의 이름도 다름아닌 피해자들의 정의에 대한 희망이고 호소이다. 그리고 정의는 종국적으로 승리할것이라는 확신이다. ​ 마지막으로 소설은 다시 한번 마쓰야마의 고양이들을 조명한다. 중풍으로 쓰러진 ‘할아버지’의 발치에 누워 있는 고양이들을 보며 하루꼬는 ‘할머니’의 고양이들을 떠올린다. 서로 대립되는 두 시점이 부딛치는 크라이막스이다. 침략전쟁을 ‘동양평화를 위한’ 성전이라고 믿어마지 않는 ‘할아버지’의 가해자시점과 ‘젊은 려염집 녀자들을 종군위안부로 끌어가고 무고한 사람들을 참수하는 경기를 벌린것이 동양 평화를 위한것이였나요’하는 춘자를 대신한 하루꼬의 피해자의 시점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정면으로 부딛치고 모순이 극도에 달하고있는 장면이다. 고양이의 등장인물과 독자를 대상화하는 기능, 패러독스로서의 기능, 냉철한 제3자의 주관으로서의 기능, 정의의 희망으로서의 기능이 동시에 발휘되고 있는 그야말로 명장면이다. ​ 그렇다면 이 제3의 시점은 대체 누구의 시점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작자의 시점이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에 밀착하여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화자로서의 작자의 시점과 그 화자를 객체화하는 ‘제3의 눈’으로서의 작자의 시점으로 구성되였다고 볼 수 있다. 시시각각 현재진행형으로 현실을 그려나가는 화자의 서술은 진행되는 순간 ‘제3의 눈’에 의해 대상화된다. 상술하다싶이 제3의 시점은 가해자의 시점도 피해자의 시점도, 그리고 남성의 시점도 녀성의 시점도 아닌 초인간적인 랭철한 제3자의 철저한 주관이다. 그 것이 과연 가능한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것이 작자의 지향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근대소설에 설치되여있는 견고한 장치를 해재하기 위해 준비된 열쇠이기도 하다.   나가면서 ​ 이상 젠더시점에서 소설 “춘자의 남경”을 읽어 보았다. 소설을 읽는 한가지 방법으로써의 젠더시점이라는것을 재강조해 두고 싶다. 페미니즘이론이 다양화됨에 따라 녀성성에 대한 정의가 다시 추구되고 있다. 말하자면 녀자는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 종교 그리고 력사와 정치를 뛰여넘어서 육체적인 공동성이라는 막연한 정의외에 과연 어디까지 녀성성의 카테고리를 귀납할수 있을까?   작자는 소설에서 젊은 녀성들을 꾀여 일본군위안소에 넘기는 정체불명한 녀인을 그리고 있다. 물론 동성에 대한 믿음과 안심이라는 함정을 설치하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페미니즘속의 레이시즘을 엿볼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일찍 구라파와 미국의 녀성들이 흑인 녀성이나 동남아 녀성을 지배하고 차별시 하는것으로 자률성의 획득을 실천해 보려고 한적이 있다. 구미의 페미니즘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에서도 같은 례를 찾아 볼 수있다. 특히 내쇼널리즘이 성행하고 국수주의에 빠져 있던 전시하에 침략전쟁이 ‘성전’이라고 세뇌된 일본 녀성들은 정부의 편에 서서 ‘대일본국방부인회’ 등 단체(소설에서는 ‘녀자애국봉사대’라는 녀성단체가 나온다)를 조직하여 일본군을 돕고 식민지에서 이민족을 지배하는것으로 정치활동에 참가하는 권리와 사회적지위의 인상등 리득을 얻기도 했다. 일본인 종군위안부인 시오노는 조선 녀성을 관리하는것으로 위안소의 책임장교 나카무라노부유키와 동등한 지배층의 위치에 있다. 이른바 ‘성전’을 위한 서로의 역할이 다르다고 하면 우습게도 일본인 종군위안부에게는 일본군인과 대등한 인간녀성으로서의 자율성이 부여된다. 일본군을 위안함에 있어서 시종일관하게 적극적이었던 시오노는 죽음을 앞두고 춘자에게 자기도 피해자임을 호소한다. 전쟁후의 일본인위안부도 일본군국주의의 희생품이였다고 하는 문맥에 일치한것이다. ​ 현재 일본이 다시금 전쟁을 할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아베정권은 녀성의 사회진출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가 급촉해지고 있는 일본은 경제성장을 위한 인력이 부족하다. ‘녀성이 빛나는 일본’이라는 아베의 구호는 정권의지를 위한 전략에 불과하나 녀성은 자립과 권리를 택하려면 동시에 헌법개정에도 찬동을 표하여야 한다. 일본에는 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녀성들이 많다고 일본의 창가학회(創價學會)와 정치평론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전후에 태여나 왜곡된 력사를 배워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세대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헤아릴수 없고 전쟁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전에 있은 참의원선거에서 아베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이 압승한 원인의 하나로 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제의 만행과 위안부의 아픔을 재현시키고 하루꼬와 같은 녀성을 부각한 소설을 펴낸다는것은 그야말로 현실적인 의의가 있는 일이다. ​ 위안부문제는 력사적 정치적 문제일 뿐만아니라 젠더와 관여된 문제이고 또 섹슈얼리티와 관여된 민감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위안부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일종 과감한 도전이 아닐수 없다. 이는 작자 자신에 대한 도전이며 문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김혁 소설가의 또 한편의 주옥의 장편의 성공을 축하하는 바이다.   "연변문학" 2017년 1월호    
406    金革长篇小说“春子的南京” 中文版出版发行 댓글:  조회:830  추천:13  2019-01-27
    长篇小说“春子的南京” 2019年1月由作家出版社出版发行。 ​ “春子的南京“是朝鲜族小说家金革先生推出的一部力作,通过刻画慰安妇群体的悲惨命运,回顾那段不堪回首的历史,进而呼吁反战与和平。 ​ “春子的南京”于2016年入选中国作协少数民族文学民译汉扶持作品。 ​ 作者金革现为中国作家协会会员、延边作家协会副主席,著作甚丰,已发表,出版了长篇小说“猩红热”、“局子街的女人,”,“诗人”,“无声时代”、“傀儡皇后”、小说集“扼杀天才”、散文集“诗人密码”,长篇纪实文学”天国无梦“,“佩斯卡玛号事件”,人物传“尹东柱评传”,“中国的毕加索- 韩乐然”等。 ​ 译者靳煜现为延边广播电视台新闻中心主任助理 ,副译审,中国作家协会会员,延边作家协会理事,延边大学翻译硕士导师。 长篇小说“春子的南京” 朝文版 ​ 放眼朝鲜族与中国文坛,迄今为止,涉及慰安妇题材的小说作品寥寥无几。慰安妇在历史上却的的确确存在过,她们是战争的牺牲品,可是日本极右翼势力不顾世界舆论的反对,擅自篡改教科书,否认这一段历史。 ​ 为了让更多的人了解历史真想,金革小说家本着对历史和后代负责的态度,在大量调查史料,实地踏查战争遗址的基础上,以艺术的手法,还原了那段历史,塑造了以春子为代表的慰安妇群像。 通过春子等慰安妇们崎岖坎坷的命运 ,深刻地揭露了日本侵略战争肮脏、丑恶、丧尽人性的罪恶本质,表达了全人类有良知的人们反对战争、珍爱和平的良好愿望。 ​ 长篇小说“春子的南京“填补了中国文学关注慰安妇群体,书写慰安妇群体的空白。 ​ /书讯 ​
405    “백세” 김학철 댓글:  조회:1647  추천:13  2018-12-10
      칼럼     “백세” 김학철   김혁      올해는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탄생 100돐이 되는 해이다. 파란많은 경력과 뜨겁고 강렬한 문체로 작가의 량심을 화인처럼 새겨낸 그이의 문학은 여전히 우뚝하다. 그이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류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 조선의용대 창립 사진, 동그라미 안의 앞줄 두분이 석정 윤세주, 약산 김원봉이고 윗줄이 김학철이다.   김학철과 더불어 100년이라는 상수(上壽)로 기억되는 문화명인들이 적지 않다.   올해는 또 사재를 털어 화림신인문학상을 제정하여 문학후대들을 길러낸 항일녀걸 리화림이 탄생한 10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연변에 오래동안 체류하면서 그 체험을 치렬하게 엮어낸 한민족 사실주의 녀성작가 강경애는 탄생 11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명년이면 곧 온 겨레가 애대하는 윤동주 시인도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영원한 청춘” 윤동주가 100세 로인으로 우리곁에 다가오는것이다.    해외에는 사후 백주년을 맞는 문호들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가, 미국에서는 “야성의 부름”의 작가인 소설가 잭 런던이 올해로 사후 100주기를 맞는다.   탄생 혹은 타계가 백주년으로 그 의미가 다시 돋을새김 된다. 인고와 질곡의 긴 시간을 척각으로 헤쳐온 김학철처럼 치렬한 시대를 헤쳐 나가면서 우리 문학사의 주역으로 우뚝 선 이들은 응분의 역할로 그 선각자적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민족의 찬란한 성좌요, 지워지지 않는 전설이다. 그들이 지내온 시간과 일구어낸 작품의 업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자리에 많은 후배, 제자들이 있고 오늘의 조선족 문단이 있다. 백년이란 시간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문학사적 세월이 어떤것이였던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본다.   그닥 길지않은 문단사에서 처음 백주년을 맞는 문인들이 등장한 우리 조선족문단은 서둘러 거목들을 기릴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이 우리의 문학 나아가 민족사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피는 일은 사뭇 중요하다.  후대가 선대의 루루세월 경유해 온 문학생애와 공적을 알아가는 이러한 기념과 조명은 변혁기 고전하고있는 우리문단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수 있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내는 계시로도 될수 있을것이다.   올해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쉐익스피어는 무려 서거 400주년을 맞는다. 100주년, 200주년을 넘어 설 우리의 문학을 꿈꾸어 본다.      “연변일보” 2016년 4월 14일     
404    한춘과 김혁의 문학대담 댓글:  조회:942  추천:12  2018-11-11
  . 대담 .   명작, 그 영원한 인류의 메시지    대담자   김혁&한춘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한춘 (시인, 전 흑룡강신문사 문예부 주임)     김혁:      한춘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은 통신수단의 눈부신 발달로 이렇게 메일로 “변강의 오지” 연변에서 “동방의 빠리” 할빈에 있는 선생님과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않고 대화를 나눌수 있어 참 기쁘군요. 한춘:   반갑습니다. 김혁작가님.   김혁:   그런데 생님이 보내신 대담고가 저의 컴퓨터의 시스템이 구식이여서 파일이 열리지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외려 신식 시스템을 쓰시는군요. 오늘 저희들이 이야기하려는 화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각 TV채널들에서 드라마 “신판 수호전”을 방영하고 있는데 그 붐을 타서 90년대판 “옛 수호전”도 어떤 채널들에서 더불어 방영되고 있습니다. 신구 드라마를 비교하하면서 시청하노라니 느끼는바가 새롭습니다. 오늘은 불변하는 명작의 매력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가 합니다.   한춘:   네.마침 중국 항간에 도는 이런 말이 떠 오릅니다."나이들어서는'삼국(연의)'를 읽지 않고 어려서는'수호(전)'을 읽지 않는다(老不看三国,少不看水浒)" 말하자면 다 명작은 명작인데 부동한 년령에 따라 부동한 자세로 작품을 접수한다는것입니다.그러니 그것이 명작일진데는 명작으로서의 '매력'이 객관적으로 내재하고 있습니다.  명작이라 할때 응당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긍정하고 보편적으로 존중하고 보편적으로 선호한다는 공성을 띄고 있어 사람을 사로잡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학생들과 이런 대담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조설근의 ”홍루몽” 원문을 읽은 사람은 손을 드시오."  손을 드는 학생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홍루몽”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30명 되는 학생들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여 그 내용을 알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대답은 각기 달랐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만화책을 읽고 알게 되였다는 것, 영화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에니메이션을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테레비 특강을 듣고 알게 되엇다는 것,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엇다는 등 그 도경은 각기 달랐습니다.그러나 한가지 공동한 점이 있으니 ”홍루몽”이 중국의 명작이고 보옥, 대옥, 보차의 삼각관계를 대충 알고 있습니다는 점입니다.말하자면 그들은 비록 작품 원문을 읽지 않았지만 ”홍루몽”이란 작품을 대체로 긍정하고 대체로 선호하며 대체로 숭상한다는 이 점입니다.    김혁:   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가치를 지닌 명작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발표이후 오랜 시간 국계와 민족을 넘어 여러계층의 인류에 회자되는 명작들은 지난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물려주는 역할을 하고있지요. 홍수처럼 쏟아지는 책의 물결속에 “옥석”을 가려내기는 쉽지않습니다. 여기서 널리 회자된 명작들을 찾아드는것이 바로 그 옥석을 가려내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일겁니다. 그러고보면 명작들은 달리 “불로장생”을 구가하는게 아닙니다. 명작만이 가지고있는 매력은 우리 독자들 더욱이 우리 문학창작자들이고 보면 영원히 읽어가야 할, 연구해 나가야할 화두이겠지요.   한춘:   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의 아이들이 그 명작들을 소외하고 있다는 그점이지요. 학생들에게 다른 한 문제를 물어 보았습니다."곽경명(郭敬明)의 소설 ”꿈속에 지는 꽃잎 얼마이던가(夢里花落知多少)를 읽어본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수풀처럼 손을 들더군요. 나는 이 책을 한 30페지쯤 읽고 더는 읽어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작품의 재미는 20대 좌우 청춘남녀들의 구미에 맞는 그런 내용이었기에 일흔을 바라는 나의 독서취미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김혁:     곽경명은 어느 설문조사에서 로신, 파금(巴金), 로사(老舍), 가평오(贾平凹), 여추우(余秋雨)와 더불어 중국10대작가명단에 올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20대작가이지요. 제 딸애도 곽경명의 팬 입니다. 곽경명이 주필을 맡고있는 잡지 “최소설(最小说)”을 창간호부터 소장해 두고 있습니다. 몇백만부가 나가는 신세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잡지로 알고있습니다. “소설월보”나 “수확”, “망종”같은 80년대 베스트 잡지를 읽어온 저의 세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보이는 잡지였습니다. 다른건 제쳐놓고도 오늘의 세대와 오늘 독자층의 미감을 겨냥한 모던한 잡지로서 그 정교함의 극치를 달리는 디자인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그 잡지를 딸애네 또래들은 걸탐스레 읽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작을 읽으라고 몇권 굳이 추천하니 “그런 ‘구닥다리’를 꼭 읽어야 하나요? 하고 반문하더군요. 딸애또래들의 이런 반응을 보노라니 곽경명이 10대작가에 선정된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리던 비평가들의 론설이 떠올랐습니다. 그중 한 비평가의 남다른 분석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청소년들은 류행문화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고있고 독자의 독서취미와 문화형성은 종합적인 형성과정이다. 례를 들면 류행가요, 네트워크 등은 청소년들의 문화형성에 거름을 주고있으며 문학은 단지 류행문화의 일부분일뿐이다.하기에 억지로 독자들에게 로사,파금의 작품을 읽게 하는것은 이제 더는 현실적인 독서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론점으로 볼때 신세대들을 위한 그들만의 적성에 맞는 열독방식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춘: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베스트셀러와 명작의 구별점을 화닥닥 팔리는 것과 오래 오래 줄곧 팔리는 것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사실 지금 신세대들이 책을 읽지 않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취미에 따라 나름대로의 선택이 있을 따름입니다.그러나 명작은 어느 한 사람의 취미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모든 사람은 다 문학감상과 예술감상에서 자기의 취미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내심 수요에 따라 좋아하는 어느한 풍격이라던가 어느 한 내용이라던가 혹은 어느 한 형식에 취미를 가질수있습니다.이런 취미는 타고 난 천성이며 천성이기 때문에 당당한 당위성과 합리성이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취미의 각도와 시점과 층차와 차원이 각기 부동할 뿐입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표준과 대중적인 표준이란 두가지 표준이 있습니다.때로는 대중적 표준과 개인적 표준이 통일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때문에 한 작품을 두고 그 작품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가 물어 본다면 백사람이면 백 하나의 답이 있을수 있습니다.   김혁:   이른바 명작이라 함은 “제목은 알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들 요즘 독자들은 우수개로 말하더군요. 높은 명성에 비하여 실제로는 별로 읽혀지지 않는게 “명작”이라는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요즘들어 달라진 독자들의 “열독취미”대로 명작은 대저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는 “걸리버 려행기”,  “돈키호테” 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른바 “잘 읽혀지는 명작”이라 할수 있지요. 이 경우는 말하자면 대중성, 통속성이 두드러지면서 여러차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져 원래 텍스트를 읽지 않았지만 어쩐지 읽은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들이라 하겠지요. “제인에어”, “몽떼그리스도 백작”, “삼총사”같은 작품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도 이러한 범주에 해당되겠죠.   다음 한가지는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강”, 또스또엡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까뮈의 “페스트”, 유고의 “93년”같은 작품들입니다. 누구나 작가와 작품의 줄거리와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는 있는듯하지만 막상 작품을 완정한 문학 텍스트로 읽지 못한 이들이 많지요. 책의 분량이나 문체의 표현, 구성방식이 독자들뿐아니라 전문 창작자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작품의 경우가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문호 빅또르 유고의 “레미제 라블”같은 명작은 이런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듯 합니다.   한춘:   여기서 독자들의 시각을 헤아려 볼수 있겠지요. 로신이 ”홍루몽”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독자의 감수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경학자들이 읽으면 '점치기'로 볼것이요 도가들이 보면 남녀 상열지사로 볼것이며 문인들이 보면 사랑이야기로 볼것이며 혁명가들이 보면 청나라를 반대하는것으로 볼것이고 난봉꾼이 보면 대궐안의 스캔들이라 볼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명작이라 할 때 명작으로서의 기본 요소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명작은 명작으로서의 예술표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명작 예술 표준에도 여러가지 설법이 있겟지만 적어도 아래 세가지 요소가 내포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서 명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고 봅니다.   첫째 독자의 기본 심성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 요소입니다. 이 매력요소란 과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문학리론과는 좀 다른 견해일것입니다.모택동은 ”홍루몽”을 세번이나 읽었다면서 처음에는 그저 이야기로만 읽었는데 후에 두번 다시 읽으면서 홍루몽을 통해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력사를 읽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즉 작품의 심각한 철리, 사상, 시대성 등으로 그 작품의 매력을 평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령 철리나 사상이라 할때 이와같은 사상이나 철리는 다 우리 내심의 기본심성 본체에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에 존재한것입니다.공자나 로자, 장자, 그리고 맑스나 헤겔이나 칸드의 사상이 다 위대한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고금중외 대현인, 대사상가,대철학가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만물을 보는 우리의 눈을 튀워줄 수는 있어도 인생의 기본 심성의 각성을 대치할수는 없는것입니다. 명작이라 할때 작품에서 제시하려는 사상을 자기가 체득한 인간 심성의 보편적인 감수로 전환시켜 표현함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이 일생동안 가슴의 내부에서 번득이는 영원한 메아리로 남아 있게 합니다.즉 명작은 작자의 감수를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감수를 새롭게 살려내는 매력이 있습니다.         둘째 명작은 사람들에게 잠자고 있는 심층의식를 개우쳐 준다.인간심층의식이란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타고난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지칭한다. 이것은 지역성을 초월하여, 시간의 전후를 초월하여, 피부색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전달하는 하늘의 메시지나 다름이 없다.예하면 궤테의 ”파우스트”는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일단 그 희구가 실현되었던가 자기가 바라는 목적에 도달하면 그 즉시 파멸, 추락,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는 영원한 추구의 힘을 실어다 줍니다.이점은 인간 실존의 기본이라고도 말할수 있거니와 이와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심층의식의 각성은 작품의 예술감화력, 즉 작품의 매력과 정비례가 됩니다.     셋째 명작은 남다른 독특한 작품 형식과 수사법으로 읽는 이의 신경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중국 근대소설의 초석을 쌓은 ”금병매(金甁梅)”는 역사이야기를 쓴 ”삼국연의”나, 영웅전기를 담은 ”수호전”이나. 판타지같은 ”서유기”와 달리 인정세태, 세상물정을 쓴 명작입니다.서문경이 갑부로 된 이야기로부터 그가 쇠락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인정세태를 묘파하기 위하여 작자 란릉소소생(蘭陵笑笑生)은 그에 합당한 형식인 간결한 묘사(白描)법을 아주 능란하게 운용하였습니다. 로신은 ”중국소설사략”에서 ”금병매”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작자는 당시 인정세태와 세상물정을 통달하였으며 손금보듯 환하게 잘 알고 있다. 작자가 형용한 것을 보면 혹은 류창하게, 혹은 우회적으로 혹은 노골적인 폭로로, 혹은 함축적인 풍자, 때로는 여러가지 수법을 겸용하여 서로 어울리어 변화무쌍하게 하는 등 정말 무릎을 칠 정도다.’금병매’작자의 간결한 묘사법에 관한 한 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한 인믈을 쓸때 그 말투로부터 시종 일관하게 그 인물의 기본 성격을 그려냈는바 간결한 묘사 몇 마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여 주었다" 그 어떤 형식을 취했든, 그 어떤 수법을 취했던 작품의 표달방식과 전달형태에서 독특한 개성을 구비했을 때 독자들의 취미를 불러 일으킬수 있는 틀, 즉 형식이 있으며 이 형식이야 말로 읽은 사람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줄수 있습니다.   김혁:   네 때문에 비록 손쉽게 접하는 명작이라 해도 읽는자의 시각에 따라 틀릴수도 있겠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그 극적인 스토리와 뛰여난 판타지성격으로 하여 어린 독자들에게도 매우 많이 읽혀지고 있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뛰여난 정치소설, 걸출한 풍자소설로서 젊은 층들이 접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외설적인 대목도 들어 있어 베스트라는 쉬운 범주로는 묶을수 없습니다. “돈키호테” 역시 어눌한자의 코믹한 무용담으로 보이겠지만 상징성이 매우 높은 작품이지요. 또 서구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데서 그 작품이 가지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작에 대한 번안, 개작작업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지칠줄 모르고 끊임없이 진행되고있는것이지요. 그중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끊임없이 번안되고 드팀없는 사랑을 받는 “삼국지”를 일례로 들수 있겠지요.   한춘:   아시다싶이 중국, 한국, 일본은 이른바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으로서 고대로부터 상호간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일찍 당나라시기 일본과 신라는 많은 유학생을 중국 장안으로 파견하였으며 당나라는 빈공과를 설치하여 이와같은 외국 유학생의 과거길을 열어주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과 신라에서 많은 승려를 중국으로 파견하였으니 그중 일본 승려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취록한 장보고의 적산법화원과 신라방 사적이 유명합니다.즉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중국의 많은 문화가 일본과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상황을 살펴볼때 조선조 초기 선조(1568――1608제위)가 ”삼국지연의”를 읽었습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를 다니는 사절단들이 중국의 소설을 행장에 몰래 넣어 들여 왔고 가장 처음 정음으로 소설을 지은 허균(1569――1618)의 중국문학소개를 보면 ”삼국지연의”,”수호전”, ”금병매”, ”서유기”등 중국의 명작이 이미 한국에 전파되였습니다.원래 유일하게 문화교류를 진행한 국가가 중국이며 이로서 중국문화에 경사되어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 시기 아주 발달한 중국의 소설문학의 전래와 더불어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 소설에 경도되는것은 가히 리해할만한 일입니다.이때로부터 ”삼국지연의”에 관한 내용이 한국 문인들에 의해 여러가지 형태로 재탕되었는데 시조에도 자주 나오고 서울 잡가에도 나오며 유명하기는 판소리 열두마당의 한 마당으로 자리를 굳혀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역사이야기로 남게 되였다.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화사상에 물젖은 한국인들의 사유방식과도 갈라 놓을수 없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인쇄문화의 발달과 다매체의 활약에 힘입어 삼국지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열중하고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삼국지 파생물이 소비자들의 구미를 한껏 돋우어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번역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찍 월탄 박종화의 번역이 있었으며 이어 리문열, 황석영의 번역서와 중국 조선족 리동혁의 번역서가 줄줄 이어 나오면서 한국독서계의 장안화제로 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삼국연의란 명작 자체의 브랜드 자원을 빌린것도 있겠지만 전투장면의 세밀한 묘사, 대규모 전쟁의 용병술, 일대 일 교전의 충격,명책사, 명재상, 명장군 등 각 부동한 력사인물의 개성적인 성격과 그들의 운명 등이 가슴에 구멍이 나도록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놓고 볼때 문화적으로 수용성이 높고 적극적으로 외국 문화를 접수하는 전통이 있으며 한국의 고전 군담소설에서 삼국지와 같이 인기를 끌수 있는 작품이 없는 상태에서 이미 익숙하고 또 접수 수용에 거부감이 적은 중국의 삼국연의를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는 것은 선진문화에 대한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김혁: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는 그 정평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방영되고있는 “신판 수호전”에 앞서 “신삼국연의”가 새로운 버전의 드라마가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화제가 끊기지않고 있지요. 총 95회라는 방대한 용량에 중국 최고의 연기자 군단과 거대한 투자가 결합되어 화려하고도 거대한 영상미와 숨 가쁜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려냈습니다. 여기서 진정 명작이라는 그 웅숭깊은 문화력의 력동을 보아낼수 있었습니다.   한춘:   이 현상은 마치 오월단오가 중국에서 유래되였다고 하더라도 오월단오에 담은 문화내역이 완전히 한국화되었고 또한 극대화 되어 강릉단오제가 세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여 유네스코에 기록된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 전파된 유교도 한국의 종묘제레 및 종묘제례악이 세계 무형문화로 지정되고  불교가 중국에서 전파되었지만 한국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여러 문화, 종교 령역에서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문화라는것은 류동하고 접목되고 파생하는 특징을 갖고 잇다.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나 다 자체의 국한성과 제한성과 빈 공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타국이나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접수, 수용, 개조, 활용하여 자체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것이 인류뮨화발전의 법칙입니다.   김혁:   장예모의 영화작품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영화 “영웅”에서 그 복색차림이나 미술배경이 일본의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 擇 明) 의  영화 “란(亂)”을 많이 닮았다고 비평가들이 꼬집었는데 면바로 보았지요. 그 복장설계는 다름아닌 구로사와의 손녀가 맡았던거지요. 그만큼 구로사와의 영화를 보며 자라난 세대로서 장예모는 그 우수한 영상미를 수용하고 활용해 냈던거지요. 사실 구로사와 자신도 영화 “란”의 모티브는 쉑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따오지 않았습니까. 장예모의 경우 그의 영화 “붉은 등롱 높이 걸렸네”는 류항(刘恒)의 명작 “복희(伏羲伏羲)”를 개편한것이고 그 영화가 다시 무극으로 개편된적 있습니다. 또 이딸리아의 작곡가 푸치니의 세계적인 오페라 “투란도트(图兰朵)”도 장예모에 의해 새롭게 태여난적 있습니다.   조선족의 저명한 테너 김영철도 극중에서 한 인물을 맡은걸로 알고있는데요.   이렇게 명작은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독자들과 끊임없이 만나면서 그 과정에서 서로 수용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새로운 명작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현대미감에 걸맞는 새로운 쟝르와 문체로 변화하여 새로운 독자와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고 있는거지요. 새로운 방식으로의 변화를 말하자면 그중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의 개편현상도 일례로 들수가 있겠습니다.     한춘: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으로 변화된것은 커뮤니케이선이 고도로 발달하고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가 그 진원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가령 “삼국지”를 놓고 볼때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이런 문화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김혁: 네. 일본은 애니메이션의 왕국이란 호칭이 붙어 있는 나라이지요. 일본에서는 오래전 90년대초에 이미 “삼국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2009년전에야 삼국지를 애니메이션화 했는데 그것도 제작진을 살펴보니 일본의 애니메이션계의 베테랑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한춘:   네 그것이 이제는 또 게임으로 변화되였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에서 또 한차례의 고조를 이루었으며 지금 중국도 청소년들이 여기에 매몰되어 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가 말하는 게임은 도박성 게임을 두고 하는 말인데 중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박에 빠지면 집을 저당잡히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아편에 빠지면 안해까지 팔아 먹는다." 도박이 사람을 끄는 그 보이지 않는 마력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명작 게임같은것은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제력이 약한 그들에 끼치는 피해는 너무너무 엄청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오락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란 태여나면서 즐거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역시 한번 빨려 들어가면 다시 헤어나오기 어려운것은 번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선호하고 이를 좋아하고 이를 반기는 청소년들이 많아 시장전경은 언제나 밝다. 이것이 명작 게임이 시들지 않는 원인입니다.   에니메이션은 게임과는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내 손녀가 지금 1학년에 다니는데 학교 가기전까지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데로부터 지금은 테레비나 컴퓨터앞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글자도 한 2천자쯤은 읽을수 있는 형편이며 슈제트 발전변화도 가히 알수 있는 처지라 집에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두시간을 할애하여 손녀에게 주었습니다. 물론 아동프로만 보는데 주로는 에미메이션을 봅니다. 일단 거기에 끌려 들어갔다하면 할매 할배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고 밥도 테레비 앞에서 독상을 차리고 먹습니다.아주 생동하고 기이한 인물 이미지 디자인, 그리고 층격을 주는 등장인물(등장물)의 엑션동작, 맑고 밝은 화면설계 등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끄는데는 너무도 충족합니다.  나는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손녀의 생활이 너무도 단조롭기에 테레비나 컴퓨터를 통해서라도 견문을 넓히고 상상력을 키운다는 뜻에서 출발한것입니다. 그리고 드문 드문 그 내용을 물어보면 제접 청산류수로 이야기의 맥을 제대로 이어 엮는다.말하자면 에니메이션은 아동들의 지력개발에 일정한 도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혁:   하기에 애니메이션제작이 요즘 영상 제작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미식”으로 되여 있지요. 요즘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꼬마양과 승냥이(喜羊羊 与灰太狼)”라는 애니메이션은 그 간단한 캐릭터에 권선징악의 낡은 제재를 되풀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7억여원의 수입흥행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춘:   그러나 여기에 역작용도 있을것입니다. 그 역작용은 적어도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니메이션을 보면서 테레비같은 시청에 취미를 붙이면 앞으로 독서취미를 잃게 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김혁:   저희 세대까지도 흑백텔레비 그리고 컴퓨터는 아예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화환경을 지내왔습니다. 변변한 대중매체가 없어 어차피 도서에 친숙하게 되였지요. 그런 우리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매체에 로출된 요즘 세대가 독서에만 매여 있는다는게 사실 쉽지않은 일로 되여버렸습니다. 그만큼 인터넷, 모바일등 을 통한 다양하고 현대화한 기기들을 통해 새로운 독서방식이 새 세대들에게 널리 풍미되고있습니다.   한춘:   도서는 인류문명에서 지금까지 창조한 가장 최고, 최상의 문화자원입니다. 이 자원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 하는것은 한 사람의 성장에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독서취미는 어렸을 때부터 양성하여야 하는것이지 다 큰 다음에 새로 독서습관을 키운다는것은 가능성이 별로 많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만약 문학을 지망한다던가 인문과학에 취미를 붙였다면 몰라도 대체로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니메이션 등을 통해 이미 명작의 내용을 거의 다 알게 되면 앞으로 명작 본문을 읽을 욕망이 사라지게 될것입니다.결과 그는 명작의 매력이 어떤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명쟉을 읽고 읽지 않는것은 한 사람의 문화품위와 관계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긴 컴퓨나 테레비가 없을 때도 명작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취미생활이 아주 다양해진 지금 작가지망생이 아니면 꼭 명작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 고집한다것 또한 고루한 생각일것입니다.    김혁:   네, 절주빠른 요즘의 현대생활에서 몇권 지어 수십권짜리 세계명작을 쌓아놓고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오래된 작품의 문장호흡이나 원작의 리듬이 요즘 사람들의 감각에 적절히 부응하기 어려운 등 여러가지 탓도 있을 것이구요. 때문에 명작을 번안함에서의 현대독자들의 새로워진 감수에 맞추기 위해 제작자들은 고심하고 있지요. 그 좋은 일레가 삼국지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도 중국 방송국들은 삼국지를 드라마로 만들어왔지만, 이번 작품은 완연 다른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력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삼국지”의 재래의 판본들은 전체적으로 류비를 높이 평가하는 반면 조조를 폄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러한 틀을 버리고, 삼국의 인물들을 상대적으로 공평하게 그려냈으며 “간웅” 조조를 시대의 영웅으로 발굴해 새롭게 력사의 무대에 올려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삼국지”하면 무조건 그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였던 “도원결의”는 이번 작품에서 아예 생략해 버렸습니다.   언어면에서도 기존의 작품들이 정통사극 형식을 따르면서 매우 “난해한” 용어들이 많았다면, 신작의 경우에는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또한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으로 웅장하고 스케일이 넘치는 화면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시도로 바쁜 절주에 지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참조계의 “성찬”에 미뢰을 잃고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는 독자군에게 명작의 진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지요.   서점가에서 보니 “자동차족(汽车族)”들에게 명작의 일독을 권하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자동차족들의 CD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명작 고전들을CD로 제작하여 시리즈로 나오고있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시도라 볼수 있습니다. 명품차를 몰고 달리면서 “동으로 흐르는 강물/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성패 다 씻어가 버렸네”하고 “삼국지”를 경청하는 장면, 그야말로 현대인의 맛과 멋이 우러나는 쿨한 풍경이 아닌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 의해 온라인에서 절찬을 받으며 련재되고있는 “타임머신 삼국지”에서는 “보마”승용차를 몰고 동한말기로 돌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명작의 패러디 현상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가 합니다. 명작에 대한 패러디는 상업에 치우친 결과물일가요? 아니면 명작에 대한 비하일가요?   한춘:    명작의 페러디 현상을 단순한 모방작으로 국한시키는것이 아니라 넓게 파생작품으로 확대하여 볼때 할말이 많아집니다.    십수년 전 섬서성의 유명한 작가 가평오(贾平凹)가 장편소설 “페허의 도읍(廢都)”을 발표한 즉시 평단의 빛발같은 지탄을 받았다. “금병매”를  흉내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읽어보아도 그 지탄이 과분한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왕씨 노친이 서문경에거 금병매를 접근할때 술상에서 맘을 떠는 열가지 수작을 서술한 “금병매”와 “수호전”의 그 단락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서안일대의 인정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수작이 틀림이 없다. 곽경명의 성공작(成名作) “꿈속에 지는 꽃 그 얼마이던가”는 완전히 도작이라는 볍원결론까지 나온 작품입니다. 비록 그가 도작한것은 명작은 아니지만 그가 도작하여 새로 쓴 작품은 베스트가 되였다. 곽경명은 도작이라는것을 승인하면서도 공개사과서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우겨 지금까지 나왔다. 이처럼 패러디 현상이 문단을 흐리는 일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 하는것은 이런 패러디가 아니라 파생작, 이를테면 명작을 견본으로 한 다른 예술쟝르의 개작, 예하면, 후속작(續作), 개작(아동판, 축소판), 드라마, 영화, 회곡, 만화, 에니메이션, 음악, 미술작품 등을 두고 몇마디 할 말이 있습니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떤 형식으로 파생되었던간 명작 원작은 이로서 괴멸됩니다는 점입니다. 즉 원작은 사라지고 개변된 작품만 살아있게 됩니다. 개변된 작품은 원작을 두번이나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한다. 첫째는 예술형식의 개변이요, 두번째는 시대적 개변입니다. 부동한 예술 형식은 부동한 예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원작에 충실한다하여도 원작 원유의 예술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동한 시대에 부동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원작의 원유 예술의 지향과 멋과 맛과 향기를 변형없이 살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열기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신편삼국연의”와 “신편수호전”, 그리고 얼마전에 구설이 많았던 “신편홍루몽”은 거대한 투자와 최고의 출연진, 최고의 연출 들이 동원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보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원작에 물든 사람을 끌기에는 택부족한 것입니다.   “삼국연의”나 “수호전”은 그나마 전쟁장면이나 격투 장면이 있어 스토리가 재미있기 때문에 일정하게 안구를 흡인할수 있지만 “홍루몽”은  안구를 끌수 있는 장면을 만들 그런 ‘감’이 별로 없어 드라마의 매력은 전혀 볼품없이 됩니다. 예하면 림대옥의  ‘명작’, “홍루몽”의 주제시라고 할수 있는 “꽃을 묻으며 읊은 시(葬花詩)” 는 림대옥의 애절한 심경을 가장 핍진하게 전달하는 대목입니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 대목에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림대옥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차적인 시청각 예술로서 시청자의 시간적 음미여지를 주지 못한다. 때문에 림대옥의 인물성격을 요해하는데 일정한 장애를 설치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명작은 명작대로 하나의 문화자원으로 존재하고 자원은 그것을 활용할때라야 충분히 자원의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문화자원의 가치는 시장가치와 예술가치가 있습니다. 한때 중국에서 “문화가 무대를 만들고 경제가 주역이 되어 출연한다”라는 말이 성행했고 각지의 관원들의 입말이 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이 말에 어페가 있습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화도 하나의 산업이 되어 얼마든지 재부를 창출할수 있습니다는 일념이 선것입니다. 장이모오의 영화 한편의 입장권 요금이 2억원을 넘는것이 있습니다고 하니 그가 창조한 문화제품의 재부는 대단한것입니다.   명작의 여러가지 파생물은 문화자체가  문화자원을 개발하여 일정한 예술가치와 시장가치를 잘 결합시키려는 한 도경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월극(越剧)  “홍루몽”은 원작의 묘미를 다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월극으로서의 예술미는 충분히 표현하였으며 또한 월극이 중국의 국수(國粹)나 다름없기 때문에 문화자원을 잘 활용한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시장을 겨누고 명작을 리용하는것은  예술의 ‘매력’이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는것일뿐입니다. 지금 많은 명작 파생물에 돈냄새가 너무 나는것이 현실이며 이 또한 어쩔수 없는 시장경제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혁:   네 같은 생각입니다. 명작은 영화나 예술 작품에 무궁무진한 모티브를 제공해왔습니다.   원형 그대로가 아닌 쟝르와 국적, 세대간의 벽을 넘어 새롭게 재탄생된 명작들이 수두룩합니다.   “서유기”의 경우를 보아도 그 패러디 작품들이 수두룩한데 그중 홍콩의 코믹영화의 선두주자 주성치가 패러디한 몇부는 이제 오승은판 서유기가 아닌 주성치판 서유기로 새로운 경전으로 자리매김되여있습니다. 영화에서 손오공은 시시때때 깝쳐대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랑의 순애보에 빠진 인물로, 당승은 진지한 승려가 아닌 수다스러운 아낙네로 나오고 대사도 지어 영어나 신조어로 란무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있는 사랑이라는 영원한 주제 그리고 제법 깔끔한 촬영화면, 공력들인 몬따쥬 구성으로 영화팬들의 환영을 받고있는것입니다.   그러데 문제는 시장경제에 매여 란발하는 차용이나 그 시장의 생리에 무릎꿇은 조야한 개편입니다. 어느 세계적인 피겨경기에서 명성에 대해 급급한 욕망으로 젊은 피겨선수가 히틀러의 복장을 하고 나치스의 행위를 패러디하다가 그자리에서 분노한 관중들과 심판들에 의해 쫓겨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또 고전의 굴지로 꼽히는 “홍루몽”도 “외설 홍루몽”이라는 아예 에로영화로 개편된 일례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 패턴의 정신적 진수가 아닌 겉면에 대한 모방에만 그치고 지어 왜곡한다면 그건 오래가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의 타매를 받게 되는거지요.   이처럼 다양한 가치의 혼돈세계에서 자맥질하고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모랄(moral)을 찾고 패턴(样式)을 찾는 과정에 명작을 패러디 하고 적극 번안하면서 그 무진한 매력속에서 자신의 생활에서의 답안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또 명작을 차용한 직장생활 지침서들도 수두룩히 쏟아져 나오고있지요.   한춘:   2003년 성군억(成君憶)이 “삼국연의로 본 경영관리(水煮三国)”란 책을 출판하여 한때 베스트가 되였습니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가장 환영받는 경영류 도서작자라는것을 대충 알고 있었고 또 “삼국연의”와 경영을 어떻게 비빔했는가가 궁금하여 해적판 한 권을 구입해 보았다. 제법 재미있게 썼다. 다른 경영류 도서를 읽지 않아 비교할수 없은 탓인지 인상이 괜찮았다.매마르고 까다롭고 추상적인 경영학, 시장학, 관리학의 이론을 삼국지의 인물에 담긴 이야기와 묘하게 빈죽하여 유모어적이고 해학적으로 '정숙'하게 썼다. 새롭고 기이하고 생동하고 재미있는것을 추구하는 독자들의 독서구미에는 맞을것 같았다.     2005년 여름 마침 성군억이가 할빈에 와서 서명판매활동을 가지게 되였다.그날 서명판매가 거의 끝날 때쯤 내가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책 한권을 사든 나는 그에게 기자인데 몇마디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있습니다니깐 시간이 없다면서 사절했습니다. 하긴 그는 중국 경영류 도서 1인자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니깐 지방신문의 기자쯤은 별로 눈에 차지 않았을것입니다. 이때 내가 한국의 출판계와 잘 아는 사이인데 이 책은 전에 이미 읽어보았고 시장전경이 괜찮아 보여 한국과 판권무역을 추진할 생각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를 찾아 본 주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의 눈에 반짝 정기가 돌았더군요.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후에 메일이 두세번 오고 갔는데 판권가격이 맞지 않아 판권 무역은 파탄 되였습니다. 그후에 도서시장을 보니 성군억의 '水煮'란 아이디를 빌려 후삼국이니 초한풍류니 춘추전국이니 잇달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복제품이 이처럼 줄지어 내려오는 현상은 력사를 설쩍 데쳐 낸것이 아니라 아예 폭삭 무르게 끓여 버리고 말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런 도서는 독서구미나 당기게 할수 있지 직장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긴 부동한 직장인에게 부동한 역할이 있겠지만 이런 직장 지침서에 취급한 그 비결, 책략, 수양,인격, 품위 등은 어느 한두권의 책을 보아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현실상생활중에서 터득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것입니다. 경영관리는 과학입니다. 현실의 시장경제는 성실, 신뢰를 앞세웠을 때라야 그것이 장기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일차적이고 일시적인 수작을 쓰는 한탕치기로는 그 성공을 보장받지 못할것입니다. 독서 취미가 았는 사람이라면 좀 문학적으로 다룬 책자를 선택해 재미로 읽고 유모감이나 해학담을 키우는것쯤은 바랄만 합니다. 전업 리론이 아닌 이야기식 이른바 '경영학'책은 실제 경영에 도움을 주지 못할것이라는게 나의 견해다.그래서 나는 경영, 관리 지침서는 이 한권으로 완전 졸업했습니다.      김혁:   요즘은 “시크릿(秘密)”이라는 지침서가 대세이군요. 인생을 뒤바꿀 마법 같은 비밀에 대해 탐구한다는 책인데 돈, 건강, 인간관계, 행복 등 인생의 모든 면에서 그 비밀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책,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여러가지 판본으로 나와 있더군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지침서와 같은 논픽션(非虚构)서적들이 소설과 같은 픽션(非虚构)서적보다 더 잘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마다 지침서 전문코너가 따로 비치되여있는거지요. 한춘:   인생지침서는 이와같은 실리적인 지침서와 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한때 베스터 1위에 올랐던 “누가 나의 치즈를 옮겼는가(谁动了我的奶酪)”는  인생의 생존 본질은 부단한 추구와 노력과 애로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이는 가히 실천에 옮길수 있는 인생지침서다. 인생 지침서는 심심하면 이책 저책 둘쳐 읽는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끄는 인생지침서는 공자의 “론어”와 로자의 “도덕경”입니다.  남들은 이 책을 치국(治國)지침서로 읽는다는데 나는 수신(修身)지침서로 읽고 있습니다.     김혁:   네. 번안작품, 애니메이션, 지침서 여러가지 참조물을 통해 여러가지 문체로 명작을 다시 접해보는 그 감수의 농도와 줄기가 다릅니다. 요즘 저도 명작들을 다시한번 체계적으로 읽어보려고 독서계획을 다시 세우고있습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하루에 단 몇페지씩 읽더라도 오랜 시간을 잡고 죽- 다시 읽어내려가려 합니다. 사실 살면서 맞닥뜨린 불운한 운명때문에 희망이 저버려지는 순간순간에도 버릇처럼 되여버린 독서로 명작들을 다시금 읽으며 감동을 받고 아픔을 잊는 시간은 내 창작과 독서생애에 가장 값진 시간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만큼 문학도 시절 읽은 눈과 지금의 읽고있는 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제는 남이 읽으니 나도 읽는다는 식으로 멋모르고 닥치는 대로 읽었고 지어 학교와 선생들의 강요에 가까운 권장에 숙제하듯이 읽기까지 했던 명작들 을 다시 읽으면서 그 작품들의 갈피갈피에 면면에 녹아들어간 놀랄만한 현재성과 보편성을 나이들면서 하나씩 깨치는건 남다른 맛입니다. 10여년후, 지어 20여년후 다시 읽는 순간 나는 그전에 느꼈던 전혀다른 백설공주와 어린왕자와 달따냥과 에드몽 당떼스와 에스메랄다와 보바리와 그랑데와 쏘렐과 닥터 지바고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흥미진진 스토리를 쫓아가며 읽었다면 지금은 그 스토리를 있게한 력사와 사회배경을 읽게 되고 이전에는 주인공의 용모를 살폈다면 지금은 주인공의 내심 심경을 살피며 읽게됩니다. 그리하여 진지한 얼굴,  성숙된 얼굴로 명작과 다시금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전의 주인공사이의 해피엔딩에 대한 바람과 같은 설익은 질문이 아닌 전혀 다른 인생과 사랑과 종교와 민족에 관련된 대담을 건넬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명작”을 읽었다면 지금은 “명저”를 읽게되지요. 여기서 작(作)은 지을 작이지만 저(著)는 두드러질 저로도 읽히기도 합니다. 말장난같지만 그저 이름난 작품에서 빼여나고 두드러진 작품으로 그 진미를 알고 읽게 된거지요. 명작에 대한 진수를 인제야 깨쳐 알고 읽기시작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을수록 외려 생겨나는 지적 공허감, 그 공복의 꾸르럭대는 욕망의 소리 같은 허전한 부분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명작이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명작은 세계 문화권의 공동 문화자산이며 강물처럼 흘러온 인류문화의 원천 같은 것입니다. 인류의 유산가운데 그렇게 훌륭한 명작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이러한 명작들이야말로 우리의 인성을 고매하게 만들고 정신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여 삶의 조건을 바람직하게 꾸미는 자양분이 되겠지요.   읽지 않고서도 아는듯한 명작, 때로 아는체 했던 명작, 방대한 분량앞에서 읽을 기회를 놓친 명작, 과거 발달되지못한 참조계나 왜곡된 미디어로 잘못 접했던 명작. 그러나 삶을 충만하게 채우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모든 이에게 동서양의 명작들은 여전히 커다란 감동으로 서가의 한구석에서 크게 팔을 벌린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온라인으로라도 이렇게 좋은 말씀 듣게 되여, 아니 보게 되여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빨리 컴퓨터와 머리속에 시스템을 새로 깔도록 하지요.   한춘: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깔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안녕히.   "도라지" 2011년 2월호    
403    나는 왜 그 “엘레지”를 불러야만 했나 댓글:  조회:1230  추천:12  2018-10-31
  .김혁 신간 장편소설 출간기념회 소감문. 나는 왜 그 “엘레지”를 불러야만 했나     “춘자의 남경”에 마침표를 찍고 작품의 후기를 쓰면서 그 소제목을 저는 “못다 핀 꽃들을 위한 엘레지”라고 달았습니다. 여기서 엘러지(Elegy)란 슬픔을 노래한 악곡이나 가곡으로 풀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슬픈 엘레지를 여러분 들과 함께 부르고자 합니다.    20여년 리력의 언론인 출신이라 매일이고 어김없이 경청하는 프로가 있습니다. 바로 cctv의 일곱시 뉴스입니다. 하지만 뉴스를 접하며 혹한에 들린듯 부르르 진저리를 쳤던적이 있었습니다. 그 진저리는 나의 엄청 많은 영상물 관람 리력중에서도 자주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떨림이였습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습니다. 뉴스는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한명이 열흘 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4년 가을, 나는 저 유명한 남경대학살의 현장에 섰습니다. 사비를 팔아 굳이 남경으로 향했던 것은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남경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터미널 표시판과 지하철 도어의 전광판에 그리고 도시 네 거리 곳곳에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가는 선로가 뚜렷이 표기되여 있었습니다.  기념관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서 커다랗게 새겨져있는 “300000”이라는 수자가 나의 동공을 모나게, 강렬하게 찔렀습니다. 그것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였습니다.    남경대학살은 종전 후인 1946년 이 사건을 다룬 남경군사법정에서도 명백하게 확인된 참안입니다. 남경대학살의 전범들은 남경군사법정과 도꾜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량심세력만이 이를 인정할뿐 “학살은 없었다”는 뻔뻔한 부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부인하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년전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습니다. 수십만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습니다. 위안부 배상촉구문제는 1992년 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시작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이를 랭랭하게 외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남경대학살의 부인에 이은 위안부에 대한 후안무치한 태도와 궤변 그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들 중에 중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펴낸 유명한 일본녀류작가도 있었습니다. 력사를 왜곡하는 그들의 역주행에 같은 소설가로서 나는 커다란 유감을 느꼈습니다. “력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이 외려 그 력사를 다시 기억해 내고 기록하게끔 나의 창작충동을 건드렸습니다.    남경에서 돌아와서 서재를 뒤적여 보니 내가 소장한 작품들 중에 위안부소재의 작품은 몇부 안되였습니다. 품을 들여 검색해봐도 뜻밖에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적지않았으나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더러 있었으나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민족 작가들이 쓴 소설작품은 더구나 적었고 외려 가해자 쪽인 일본에서 쓴 작품들이 몇부 있을뿐, 작품성이 들쭉날쭉해 수작(秀作)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중국문단과 조선족 문단에서 이 소재에 대한 픽션작품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었다.  지성화된 기계적 감정에 길들어 있는 우리 작가들과 가련할 정도로 적은 독자군은 이런 제재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소설, 인물전, 칼럼, 기행수필등을 동원해 우리의 영욕이 엇갈린 력사를 조명하는 나의 작업은 이 십수년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역마살처럼 가고있는 이 외줄타기가 나의 근래의 창작과 생활에서의 성향이요, 소신입니다. 그래서 다섯부의 장편을 펴내고 다음 소재에 대한 선택에 심려와 숙고를 거듭하던 중 여섯번째 장편소설의 소재로 단연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소재를 골라 잡았습니다.   그렇게 “춘자의 남경”은 2015년 “연변문학”지에 일년간 련재되였고 드디여 오늘 출간에 이르게 되였습니다. 지면을 할애해 작품을 연재해 준 “연변문학”지와 책을 선정, 출간해준 연변인민출판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도꾜 불교대학의 시노무라 리에 박사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윤동주 연구차 연변행차를 했던 박사님은 “춘자의 남경”에서 큰 편폭으로 나오는 일본어 대화들을 까근히 교정해 주었고 일본으로 말하면 “뜨거운 감자”격인 위안부소재의 작품에 사뭇 학술적이면서 심도있는 해설을 달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휴식일, 명절을 할애 해 민족의 력사유적지답사에 동행하며 땀을 휘뿌린 우리네 룡윤회 력사동아리 성원들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자신의 금후의 모든 창작성향이다”고 저는 저의 창작성향에 대해 천명한적 있습니다. “소설의 본령이 곧 '허구적 사실성'의 설득력을 주요한 미덕으로 삼는 것인데” 매체기자와 소설가로서의 병행된 삶을 수십년간 이어 왔기에 그 와중에 더듬어낸 이 것이 바로 남보다 차별화되는 창작성향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민족, 한 인물의 련대기적 사건에 대한 예술적인 재현만으로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 내면을 탐사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력사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그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면성과 립체성을 규명하는” 방대한 제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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